손병우 (2006). 대중문화와 생애사 연구의 문제설정,
언론과 사회, 14권 2호, P 41~71.
▢ 주요 내용
1. 문제제기
대중문화는 기록되지 않는다.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역사의 뒤편에서 잊혀진다. 알박스(Maurice Halbwachs, 1950/1980)는 기억이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가 시작된다고 했지만, 대중문화는 역사로 정립되지 못한 채 잊혀져 왔을 따름이다.
주변지대에서 잊혀지는 것이 당연시되던 대중문화가 언제부터인가 대중매체에 의해 재발굴되고, 대중들에게 재향유되기 시작했다. 특히 방송은 과거 자신이 생산하고, 잊혀졌던 프로그램들을 재활용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대중문화 그 자체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억을 흥미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 둘째, 대중매체의 기록성을 역사서술의 기반으로 사용하는 것.
하지만 대중매체의 기억은 중대한 약점을 지닌다. 첫째, 대중매체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지 않은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카메라는 오로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대중 연예만 기록했을 뿐, 카메라의 시선 바깥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가지지 못한다. 둘째, 대중매체의 기억은 환유적(metonymic)이다. 프레임 안에 담긴 부분적인 대상들은 전체 상황을 환유적으로 대표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대중매체는 선호하는 대상들이 있고, 따라서 대중매체의 기억의 환유성은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다. 뉴스가치 판정기준에 해당하는 영향력과 저명성, 인간적 흥미와 아울러 역동적인 장면 등이 포착될 수 있다면 영상매체는 그런 대상을 특히 더 선호한다. 따라서 대중매체의 욕망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통한 걸러내기가 필요하며, 역사적 대표성보다 보완성 쪽 가치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대중매체의 기억이 가진 약점은 다른 방식으로 채워짐으로써만 대중문화의 역사를 구성하고 복원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시절 대중문화 현장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의 생애사(life history)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2. 연구방법
이 논문에서 life history는 생애사로, life story는 생애담으로 번역해서 사용한다. 생애사 연구가 연구자의 연구문제를 중심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룬 것이라면, 생애담 연구는 한 인간의 생애를 그 사람 자신의 해석과 주관까지 포함해서 대면하는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애사 연구가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다면, 생애담 연구는 한 인간의 전 생애에 담긴 주관적인 부분을 핵심적인 정보로 여기고 그 수집에 관심을 보인다. 말하자면 생애담 연구는 일종의 정신분석학적 성격을 갖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생애담의 하나로 자서전을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생애연구는 자서전을 통해 많은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특히 삶의 여러 단계마다, 그리고 역사적 시기에 따라 사건들이 그 사람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갈등을 해소하고 타협하기 위해 어떤 적응전략을 사용했는지에 관해 파악할 수 있다(Atkinson, p. 7). 무엇보다도 자서전의 유용성은 오랜 기간 접촉되지 않았거나 접촉하기 힘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Smith, 1994, p. 288). 소외집단이나 특수직업인들에 대한 정보는 여러 유형의 생애저술(life writing)들 가운데에서 특히 당사자의 목소리가 진하게 들어가 있는 생애담, 자서전, 회고록, 일지(journal), 일기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생애담과 자서전 연구를 통해 우리는 주관성의 학문적 가치에 대해 재인식하게 된다. 객관성을 사회과학의 생명이라고 하는 풍토 속에서 생애담 연구는 화자의 주관을 연구의 중심에 두면서 연구 지평의 확대와 인식론적 변환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 생애를 이야기할 때 세 가지 주관적 개입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선택 (그는 에피소드를 선택한다), 둘째, 기억(사람마다 특히 기억을 잘 하는 국면들이 있다), 셋째, 욕망(꼭 들려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화자는 자기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한다. 따라서 생애담에서 연구자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가 자기 삶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다. 덴진(Denzin, 1989)이 생애사 연구를 일컬어 “구술자의 주관을 증명하는 문서”(Lindlof, 1995, p. 173)라고 한것도 같은 맥락이다.
3. 원로 코미디언의 생애담 : 배삼룡
1) 연구대상과 목적
이 논문은 원로 코미디어의 자서전을 통해 텔레비전 코미디의 성립에 작용했던 문화적 토대들을 파악하고자 한다. 넓은 의미에서 이 논문은 텔레비전 코미디 전사 또는 형성사에 해당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텔레비전 코미디언의 탄생에 관심을 갖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장르들은 어느 분야나 다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기록이 미미하지만 특히 코미디와 오락 분야는 더 심하다. 학문적이고 역사적 정리작업은 대단히 현격한 불균형성을 보이면서 관심권에서 밀려나있다. 이 논문의 분석대상은 배삼룡씨의 자서전이다. 여기에 쇼단 출신 무명 원로 남성코미디언 인터뷰, 악극단과 쇼단의 무용수 출신 여성원로의 인터뷰 내용 등을 보완적인 자료로 사용하였다.
2) 텔레비전 코미디언의 탄생
- 악극의 탄생과 벌전
- 배삼룡이 악극단에 입단하게 된 동기 : 순전한 열망
- 역할 : 연구생, 단역, 프롬프터, 대역, 주연과 극작가, 군예대 경력, 쇼단사회, 영화배우, 방송
- 경력 : 악극단 배우 ⇒ 군예대 경력 ⇒ 쇼무대 사회 ⇒ 영화출연 ⇒ 방송진출
- 경력의 세가지 특징 : 첫째. 흥행을 위주로 하는 상업적인 공연계 분위기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이어왔다. 둘째, 연예인과 공연을 활용하는 군 조직과 통치정책을 경험했다. 셋째, 활동의 기본 틀이 바뀔 정도로 급변하는 연예계와 대중문화계에 줄곧 적응하며 역할을 폭을 넓혔다.
- 코미디언의 내면 : 웃음을 주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과도한 정신적 억압상태를 경험한 것 같다. “내가 출연한 프로를 자식들과 같이 보기란 정말 싫습니다.”
- 텔레비전 코미디 : 1969년 MBC TV 개국하면서 생긴 <웃으면 복이 와요>에 4회부터 합류. 배삼룡의 눈에 비친 텔레비전 코미디의 새로운 점 하나, 전문작가가 있어 완전한 대본을 가지고 미리 연습한 뒤 제작에 들어갔다는 점(하지만 전문 작각의 부족으로 배삼룡 자신이 매주 서너 꼭지씩 직접 씀), 둘, 녹화방송이어서 자기 연기모습을 자기 눈으로 뜯어보고 연기를 고칠 수 있다는 점. 텔레비전 코미디언은 근대적 연예흥행체제가 본격화하면서 그 탄생이 예견되어 있었음. 근대적 공연문화로 악극단이 가장 성행하던 시기에 그것을 접하고, 타고난 연예인 기질과 열망을 가지고 악극단에 뛰어들었으며, 쇼단생활, 영화출연 등을 통해 연기력과 무대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코미디의 가장 기본적인 자원으로 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4. 생애담과 기억의 층위
기억에 대한 논의는 네 가지 범주로 이루어진다. 심리학에서의 기억연구, 내러티브 인터뷰 방법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억의 내러티브적 성격에 대한 논의, 개인의 기억이 그가 속한 공동체의 집합적 기억 테두리 안에 존재한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알박스의 심층적 논의, 역사서술의 정치적 성격에 초점을 맞춰 정치적 실천으로서 대중적 기억에 주몽한 버밍엄 대한 현대문화연구소의 대중기억연구분과의 기억 연구 등이다. 이 가운데 생애담 연구방법은 내러티브 기억(narrative memory), 집합기억(collective memory), 대중적 기억(popular memory)을 중요한 이론적 틀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이들은 한 세트라기보다는 연구주제에 따라 달리 논의되고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1) 내러티브 기억 : 시련과 구원
기억이 내러티브적 특성을 가진다는 말은 기억을 외화시킨 담론이 내러티브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내러티브적이라 함은 복수의 사건들을 시간 연속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다(Prince, 1982, p. 6~9). 이로부터 기억진술의 두 가지 차원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사건들을 시간순서에 따라 제시하는 연대기(choronology)의 차원이고, 두 번째는 플롯에 따라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사건들을 배치하는 차원이다(Jovcheloviych & Bauer, 2000, p. 58~59).
- 배삼룡 : 생애담 내러티브에서 시련이 강조. 시련을 주는 요인들은 대인관계(오해와 낭패), 악극단 생활(애환), 시대적 격변(힘겨운), 세상의 협잡(고통) 등임. 그는 그런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라기보다 벗어나는 것으로 제시한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기다리는 쪽이 부각됨. 그의 생애담은 흡사 그가 보여주던 코미디 연기 스타일과 성격이 일치.
이렇게 한 생애에 대한 기억이 깔끔함 내러티브 구조를 띤다는 것은 화자가 자기의 삶을 일정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구조화 작업을 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생애담 연구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어떤 에피소드를 주요 테마로 삼는지, 또 어떤 사례들을 주변화하거나 배제시키는지에 대한 화자의 경향성을 추출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2) 집합기억 : 반공강박
집합기억이란 인간의 집단적 존재성이 개인의 기억의 틀이 되어 나타난다는 개념이다. 뒤르켐은 집합의식(conscience collective)개념을 통해서 개인의 의식과 도덕적 양심이 그가 속한 사회의 규범적 질서로부터 유래한다며 하며, 개인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의 중첩을 나타내고자 했다. 집합기억은 알박스가 뒤크켐의 개념을 이어받아 기억에 적용시킨 것이다. 집단의 공통된 경험에서 집합기억이 생겨나며, 개인은 그런 집합기억의 틀 안에 자신의 기억을 위치 짓고 구성해낸다. 집합기억은 과거의 경험이 연속성을 유지한 채 현재로 이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감정이 부착돼 있다. 이것은 집단이 공유하는 미시적인 경험들의 집합이고, 현재의 체험 속에 살아있다. 역사가 주요 변화들에 초점을 맞춘다면, 집합기억은 유사성과 연속성에 초점을 맞춘다(Halbwachs, 1950/1980, p. 85~87.).
- 배삼룡의 집합기억 : 여성들의 행태에 대하여 다분히 전통윤리적 관점의 해석과 평가를 내림, 지금의 개그맨들의 자세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 반공강박
“과거에 대한 기억이 언제나 현재에서 출발한다.” (Assmann, 1999, p. 60)
3) 대중적 기억 : 개인사 속의 시대
현대문화연구소의 대중기억연구분과는 과거의 의미를 생산하는 두 가지 방식을 비교한다. 하나는 공적표상을 통한 생산으로서 이는 지배적 기억(dominant memory)를 형성한다(Popular Meomory Group, 1982, p. 207).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 과정 속에서 과거의 의미를 생산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대중적 기억(popular memory)이다. 이는 대개의 경우 사사로운 기억들로 분산되고, 기록되지 않고, 사회적 침묵이 강요된 역사라 할 수 있다(p. 210). 따라서 대중적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은 역사서술에서 배제되거나 억압된 자들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어서 정치적 실천성에 중심을 둔 연구가 주로 이루어졌다(Plummer, 2001, p. 402). 하지만 대중적 기억의 의미는 정치적 실천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가령 배삼룡의 자서전은 대중적 기억자료의 성격과 시대에 대한 대중의 해석 텍스트라는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 배삼룡 자서전의 대중적 기억 : 악극단 풍경, 공연연습, 공연장소로의 이동, 공연준비, 마을홍보, 공연 후 풍경, 똘똘이 이야기 등 전체적인 모습과 세부사항이 잘 묘사. 솔 밑에 낀 그을음 곧, 숯검정을 가지고 배우들이 사용하는 각종 마스카라, 파운데이션, 콜드크림 제조하는 방법에 대한 자세한 기록, 공연이나 흥행맥락에서 기억되는 4.19와 5.16 등
5. 대중 연예인의 생애담 : 기억과 숨결
푸코(1969/1972, p. 7)은 <지식의 고고학>에서 역사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전통적 형태의 역사는 과거의 모뉴먼트(기념비)들을 기억하여, 그 모뉴먼트를 도큐먼트(문서)로 변환시키려고 시도했다. ... 오늘날 역사는 도큐먼트를 모뉴먼트로 변환시키고자 한다.” 푸코는 새로운 역사가들이 그동안 전통으로 여겨지지 않던 잊혀진 전통을 다룬다는 뜻에서 이런 말을 했다(Rajchman, 1985, p. 54). 과거의 사실을 가운데 어떤 것들든 공적표상을 얻어 지배적 기억이 되지만, 많은 것들이 배제되고 잊혀진다(Popular Memory Group, 1982, p. 207). 공식적 기억의 형성은 특정한 국면에 기억이 고착(fixation)됨을 뜻하고(손병우, 2002, p. 116), 따라서 다른 것들에 대한 사회적 망각(social amnesia)을 의미한다(김형곤, 2006, p. 22). 생애사 연구는 역사 서술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영역들, 즉 도큐먼트를 남기고 있지 않은 삶의 국면들을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이고,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역사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의 첫 걸음이다.
대중문화에서 대중 연예인의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대중문화는 사회집단간의 대립의 산물이라서 억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가치하게 여겨져서 삭제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따라서 그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은 다른 영역에서의 정치적 실천과 성격을 달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배삼룡의 자서전에 드러난 대중적 기억의 성격을 통해 대중 연예인의 기억이 대중적 기억의 또 하나의 전형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을 해보게 된다. 대중 연예인의 개인적 기억을 통해 대중문화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작업은 공식적 기억에 의해 망각된 것을 다시 기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대항기억(counter-memory)으로 정립될 수 있다.
▢ 짧은 의견
대중문화, 대중기억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 침묵하고 배제된 역사를 도큐먼트해야 한다는 주장, 그럼으로서 대항기억을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고 공감함.
내가 생애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 역시 ‘방송’ 연구에 있어서 무언가 어떤 부분이 큰 공백으로 아예 삭제되어 있다는 허기 때문임.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사례로 보여준 배삼룡의 생애사 분석은 다 읽고 나면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더 허기지고 공허하다는 것임.
이것은 대부분의 생산자 연구, 생애사 연구 논문을 보면서 늘상 느끼는 감정임. 용두사미라고 할까...
결국 이것은 생애사 연구, 생산자 연구 등이 방법론적으로 어떤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어도, 이것만을 가지고는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질문과 반대로 제대로 된 생애사 연구를 연구자들이 필드에서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질문을 동시에 들게 함.
어쨌든 나의 논문에 생산자 연구는 하나의 챕터로 들어가야 하는 바, 이에 대한 좀 더 깊은 스터디가 필요.
▢ 더 읽을 거리
윤택림 (2003).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역사비평가.
임인애 (2000). 감정과 침묵: 과거가 될 수 없는 시간과 잔류자들의 기억. 『당대비평』 13호, p74~92.
조은 92001). 침묵과 기억의 역사화. 『창작과 비평』 112호, p 76~90.
Atkinson, R. (1998). The life story interview. Thousand Oaks, CA:Sage.
Halbwachs, M. (1950/1989). The collective momory. Translated by F. J. Ditter, Jr. & V. Y. Ditter. New York: Harper & Row.
Lindlof, T. R. (1995). Qualitative communication research methods. Thousand Oaks, CA: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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