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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논문아 놀자

푸코 읽기 (이영남, 2012)

이영남 (2012).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푸른역사 세미나 발제문 참고>.

 

(1) 푸코, 광기의 역사가 던지는 질문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영미권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연구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의 지적 계보에서 푸코를 읽는 것. 그래서 현대철학, 특히 프랑스 철학의 주요 저작을 같이 읽을 필요가 있다. 둘째, 푸코를 커뮤니케이션 사상가의 시각에서 읽는 것. 그래서 미시사, 일상사, 여성사 등의 새로운 역사서술 저작들을 같이 읽으며 역사가인 푸코를 상상하고, 커뮤니케이션 사상사 , 문화연구, 생산자연구, 구술사연구 등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저작들을 같이 읽으며 커뮤니케이션학 사상가인 푸코를 상상할 것이다.

 

푸코는 누가 뭐래도 빼어난 철학자이자 역사가이며 커뮤니케이션 사상가였다. 푸코는 오래된 기록을 분석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흐름을 잡아주는 것을 본령으로 하는 전형적인 역사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한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커뮤니케이션 사상가였다. 공영방송의 지난 10년을 연구하고자 하는 나의 연구 역시 푸코의 방법론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는 철학자이지만 매우 이질적인 철학자였다. 철학도, 커뮤니케이션 연구도 역사서술로 가능하다는 것이 신선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푸코가 36세에 모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논문 <광기의 역사(1961)>을 펴냈을 때, 동료 철학자들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것은 아마도 ‘광기의 역사’가 기존의 분과학문(철학)과는 대상이나 주제뿐만 아니라 서술방식에서도 특이하게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까지 철학은 ‘이성’을 연구하는 담론이지 ‘광기’를 연구하는 담론은 아니었다. 철학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언어조차 없는 광인을 다를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서술방식도 <광기의 역사>는 기존의 학술적 성격과 배치된다. 푸코는 철학자들의 물에 떠있는 특이한 기름과도 같아 보였다. <광기의 역사>가 뿜어내는 힘의 원천 중 하나는 방대한 사료를 이용한 실증적 서술이었다.

 

한편 푸코는 전형적인 역사가이면서도 기존 역사가들과는 매우 다르게 접근했던 역사가였다. 푸코는 동성애자였다. 푸코는 10대~20대를 보냈던 1940~50년대 프랑스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사는 것은 주홍글씨 같은 낙인이자 고통이었다.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 엘리트였지만, 동성애자라는 삶의 주홍글씨를 없앨 수는 없었다. 이런 실존의 그림자, 삶의 주홍글씨를 푸코는 어떻게 대면했을까? 이런 실존의 그림자와 연구활동은 서로 평행선을 그려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바로 갈림길이었는데 푸코는 갈림길에서 과감했다. 자기 삶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고 이를 적극 수용해서 연구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세련되게 표현하여 역사를 써내려갔다. 이것은 매우 혁신적인 방법론이었다. 전통적인 역사가는 객관적 역사서술을 하도록 훈련을 받으면서 역사가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 그리고 사회적 변화나 국가의 변화 등을 역사서술 대상으로 삼는데, 푸코는 정확하게 그 반대의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논문으로 제출했을 때 푸코를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거 당신 이야기 아냐?” 물론 <광기의 역사>에는 푸코라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고문서의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하여 16세기~19세기 서구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푸코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인가? 이 지점이 푸코 연구방법론의 핵심이다. 푸코는 무엇보다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대면하면서 그것의 뿌리가 되는 사회적 고통과 연계하여 역사를 서술했다. 푸코가 자신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체의 말처럼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와 논쟁하지는 않는다.” 학문이란 무엇이고 역사라는 건 또 무엇이며 소통이란 또 무엇인가? 누구의 역사이고,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구와의 소통이며 무엇을 무기로 한 소통이며, 그 소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광기의 역사>는 내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광기의 역사가 있다면 당신에게는 어떤 역사가 있느냐?” 그리고 권유한다. “당신도 당신의 역사를 써보는 것이 어떠냐?”

 

 

(2) 푸코 공부

공부는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일까? 영어 study의 라틴어 어원은 “~을 사랑하다. ~을 추구하다. ~을 위해 헌신하다”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쏟고, 그 와중에 무엇인가 진실된 것과 선용할 것을 찾으려 애쓰고,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열정의 줄을 놓지 않은 채 몸과 마음을 비치는 마음이 공부하는 모습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국어 공부의 한문 어원은 “지아비가 되는 노력”인데 오늘날 의미로는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 정도가 될 것이다. 갓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안되는 엄마의 책임처럼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책임져야 할 것과 함께 한다. 예를 들어 농부가 책임져야 할 것은 논밭이며, 사서가 책임져야 할 것은 도서관이며, 시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은 시이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아이를, 모든 기록을, 모든 논밭을, 모든 시를 책임질 수는 없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안을 수 있을 뿐이며, 한 번에 한 걸음만 내딛을 수 있을 뿐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인가? 내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인가?

푸코는 공부를 했던 사람이다. 광기를 스터디하고, 성을 스터디했던 역사가였다. 공들여 무언가를 하려면 애정이 있어야 하고, 추구의 운동성과 지향성이 있어야 하며 몰입하고 헌신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스터디할 것인가? 서구인이 아니라 자바인이 되는 공부. 푸코가 내게 들려주는 공부의 방법론이다. 자바인들은 그들 특유의 단어와 어휘들을 그들의 특유한 음성으로, 사회적 상황에 맞게 매우 완곡하게 표현한다. 서구인이 아니라 자바인이 되는 공부!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로서 푸코를, 누군가를 이해하고 선용하는 공부!

 

(3) 새로운 푸코 내러티브

시대가 엄중하다. 민주주의 가치의 후퇴, 농업과 공동체적 삶의 잔인한 파괴, 인류전멸의 공포를 몰고온 후코시마 사태는 새로운 내러티브를 요청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 고전의 의미도 달라진다. 새로운 푸코를 사유하고, 선용해야 한다. 새로운 푸코 내러티브를 풀무질해야 하는 것이다.

 

파리 지식인 푸코, 그래서 동일자 푸코는 이제 그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새롭게 사유되는 푸코가 필요하다.

 

가. 타자 푸코

푸코는 오랫동안 동성애자로 보이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이것을 동성애 지식인 딱지가 붙으면 아무도 그의 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 동성애자 푸코 - 타자 푸코가 배제됨으로써 푸코 사유는 그 지평이 좁아지게 된다. 푸코를 다채롭게 이해하려면 새롭게 변화하는 우리 시대에 맞는 푸코 효용을 찾으려면 타자 푸코를 한 축으로 삼아야 한다.

푸코는 평생 파리를 답답해 했다. 그런데 우리는 푸코를 프랑스-파리-서구철학의 맥락에서만, 또는 북미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만 이해를 한다. 꼭 그럴 필요가 없을텐데, 왜 그렇게 어렵기만 한 포코를 옹호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푸코가 어려운가, 푸코를 말하는 지식인들이 어려운가? 푸코의 주요한 저작과 사유의 영감은 대부분 파리 바깥에서 이뤄졌다. <광기의 역사>는 스웬덴 웁살라에서, <말과 사물>은 파리에서 기차로 6시간 걸리는 지방에서, <감시와 처벌>은 튀니지의 튀지니아에서, <성의 역사 2,3>은 캘리포니아에서 쓰여졌다. 푸코를 파리 바깥에서 읽는 것이 오히려 푸코를 더 밀도높게 상상하는 것이다.

 

‘타자 푸코’는 누구인가?

- 자신의 삶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

- 타자이기에 타자의 사유를 펼치던 사람

-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그것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사유하려고 했던 사람

 

푸코에게 어려웠던 것은 ‘전통적인 철학의 틀’에 갇힌다는 것이었다. 니체의 책을 읽어봐도 그렇고, 푸코가 나주 언급했던 문인(블랑쇼, 아르또, 사드)도 그러하다. 이들은 전통 속에 갇히는 것을 마치 감옥에 갇히는 것만큼이나 진저리를 쳤다. 푸코가 전통철학이 아닌 역사서술로 사유를 펼치려고 했던 이유도 타자 푸코와 연결지어야 할 것이다.

타자 푸코를 만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물음이 필요하다.

①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나가 되었으며, 지금의 나로 산다는 것이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가?

이 물음은 애초 니체가 자신에게 했던 물음이다. 주류-동일자를 선망하고 거기에 속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면서 사는 것이 세상살이이지만 이런 세상살이에 회의를 품는 순간 우리는 이 물음에서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물음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나 상처 같은 것으로 좁혀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가 <성의 역사2>에 쓴 서문을 음미해보자.

“글을 쓴 동기는 단순하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내 존재의 고통에 연민의 자락을 펼친 것이고, 호기심을 가지고 펼친 것이다. 성에 대해 이것저것 탐구하려는 호기심은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궁금했고 그 호기심으로 이 글을 썼다. 글을 읽고 쓰면서, 글을 쓰는 내 자신이나 읽는 독자들이나 일탈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규정하는 것들로부터 일탈해서 변화의 기미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면, 호기심이든 일련의 욕구든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살다보면 절대적으로 알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절절한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사람인가? 독특한 내 방식으로 다르게 사유하고 지각할 수 있을 때...” (성의 역사 2 서문)

푸코의 정향은 외면이 아닌 대면이었다. 그가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았던 것도 대면하는 자의 고통이었다.

 

②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어?” 이 물음은 배제를 위한 물음이지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한 물음이 아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깊숙한 이해를 위한 물음이다. 나는 한 층위 더 들어가서 물어야 한다.

“그 곳에 있었어?” 이보다는 구체적으로 “당신이 있던 곳은 어디였지, 그 곳에서 어떤 사건을 겪으며 그것을 어떻게 의미화 한 것이지, 그것이 지금의 당신과는 어떻게 닿아 있는 것이지?”

 

푸코든 그 누구이든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이런 물음이 필요하다. 병원체(pathogen)가 몸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 자리를 잡는 곳을 의학에서는 로커스(locus)라고 한다. 병원체는 감염증을 일으키는 기생생물이다. 임상적으로는 형태에 따라 바이러스, 리케차, 세균(구균, 간균, 나선균, 방선균). 진균, 스피로헤타, 원충 등 6종으로 분류된다. 이런 미생물들이 특정한 병의 병원체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이 되어야 한다. 푸코가 살았던 세월을 상상하는 데에는 병원체와 병원체의 자리인 로커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로커스를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좀 더 해보자.

 

로커스 이해를 위한 푸코의 사유 (장소의 정치학)

푸코의 텍스트

장소

담론

전문가

산업

광기의 역사

구빈원, 병원

의학

의사집단

의료산업

배제의 역사

공영방송

공영방송론

언론직종사자 집단

미디어산업

푸코 사유를 관류하는 방법론 중 하나는 장소의 정치학이다. 푸코에게 근대적 공간은 그냥 사물화된 공간이 아니다. 학교, 병원, 감독 등의 장소는 전문지식, 전문가집단, 전문가 집단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국가의 장치들, 산업화 등이 한데 섞인 곳이다. 푸코가 병원, 감옥, 학교, 공장을 바라본 시선은 이런 장소의 정치학에 기반을 두었다. 장소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을 어쩌면 의학에서는 병리학자들이 쓰는 일상적인 말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발음 그대로 로커스라고 했다.

 

파리 바깥의 푸코

- 북유럽의 웁살라 : <광기의 역사>의 로커스

-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아 : <감시와 처벌>의 로커스

- 미국 캘리포니아 : <성의 역사>의 로커스

 

푸코작업은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의 사유로 출발해야 한다. 동일자의 푸코가 아니라 타자 푸코를 만나야 한다. 광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웁살라 대학 도서관을 여울목으로 삼아야 하고, 성의 역사를 이해할 때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여울목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이야기, 배제의 역사를 이해할 때 서울 여의도를 로커스로 삼아야 한다.

 

(4) 비애 a bunch of pansies

푸코의 장례식. 우리는 이승만이 하와이라는 타향에서 죽었지만 그의 망향의 죽음에 무슨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고향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노무현의 죽음, 김대중의 죽음에서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어떻게 죽었는가? 그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것이 망자를 보내는 사람들이 갖는 슬픔을 만들어낸다. 1984년, 59세로 유명을 달리한 미셸 푸코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의 목잡한 심사는 여느 슬픔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푸코가 살면서 말하지 못했던 것을 장례식에 온 지인들은 알고 있었다.

 

푸코에게는 제자가 없었다. 누군가를 후원하지 못했던 사람,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살아가지 못했던 사람, 푸코는 이런 사람이었다. 푸코는 프랑스 대학사회의 최고의 영예라는 콜레주 드 프랑스 대학의 교수였고, 그의 명성은 전 세계에 펼쳐져 있었다. 미국에 가면 미국 사람들이 환호했고, 이탈리아에 가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푸코는 사회적 지위가 주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가 그런 모습은 정당하지 않아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푸코의 불능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푸코는 동지를 규합할 줄 알고, 자신의 화려한 인맥과 학맥을 활용할 줄 아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리고 푸코는 폭발할 듯한 웃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래키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 앞에서 웃는다고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아무리 웃어도 슬픔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푸코도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푸코는 완벽을 추구했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것은 달리 생각해보아야 한다. 배우 장국영이 자살하면서 나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라고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불능은 푸코가 평생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흉중에 간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나아가 누군가의 동무가 되기를 갈망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푸코는 전통적인 여성적 방식으로 관계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 유대감, 인정을 갈망했다. 푸코가 원했던 것은 연인이 아니라 동무였다. 연정이 아니라 밀도 높은 우애를 나누고 싶어했다. 자유로운 섹스가 아니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푸코에게 동생애의 삶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었다. 푸코에게는, 동성애자에게는, 타자에게는, 일상적으로 커버링(covering, 숨겨야 하는 것이 있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파시아(fascia)가 아닐까? 파시아는 의학에서 “막”을 의미하는 말이다. 파시즘의 어원은 몽둥이라는 뜻이기에 어원상으로는 파시즘과 파시아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일상적 파시즘을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면, 파시즘보다는 억압적 파시아가 훨씬 실감난다. 파시아는 말하자면 끈적끈적한 막들이 사방팔방 자신을 에워싸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의 동성애 삶고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 <빵 가게 재습격>을 관통하는 언어는 ‘강한 공복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빵가게를 습격한 이유는 단 하나, 한 밤에 깨어 도저히 진정되지 않은 공복감 때문이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맥도날드를 습격해서 빅맥 몇 십개를 강탈해서는 먹어댔지만 여전히 허기는 지지 않았다. 그것은 삶의 극심한 허기였다. 이 극심한 허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무리 사랑해도 영원할 수 없다는 점, 아무리 사랑해도 순정일 수 없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많은 사랑은 자신의 파시아 때문에 사랑의 잠재태, 사랑의 외곽을 품을 수 없다.

 

a bunch of pansies... 이 표현에는 게이를 향해 계집애처럼 나약한 놈들, 울먹이며 사랑 나부랭이나 들먹이는 혐오스런 놈들이라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은 197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의 슬픔을 말할 때 은어처럼 사용되었다. 이 말이 왜 게이를 비하하는 말로 쓰이는지, 이것을 이해하려면 팬지꽃의 슬픈 전설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건은 단 한 발의 빗나간 화살로부터 시작된다. 어느날 큐피드(사랑의 신)이 쏜 화살이 엉뚱한 곳에 맞았다.

“ 큐피드, 당신이 쏜 화살이 그만 빗나가 나를 맞았네요. 당신도 알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런데 왜 내게 화살을 쏘아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은 건가요? 당신은 내가 아니라 님프를 사랑했던 것 아닌가요? 내가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들 당신 마음에는 늘 님프가 있잖아요. 이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미 당신의 화살을 맞았기에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운명이 내게 자리를 잡았네요.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나는 속으로 웁니다.”

그런 침묵의 울음이 자라 세 가지 색이 되었다. 비록 그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큐피드를 사랑하고, 그러면서 화려한 색을 피웠지만, 그 다채로운 색에는 처연함, 비통함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푸코에게는 팬지꽃 한 다발의 비애(a shadowy life as a bunch of pansies)가 있었다. 푸코는 아버지가 죽은 후 가끔씩 어머니만 만나러 갔을 뿐 원가족과 교류가 없었다. 더구나 푸코는 이성애 결혼제도에 기반한 가족도 형성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연인과 동무였다.

그는 이 비애감, 내면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대면했다. 그리고 그것을 외부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작업은 결국 자신을 대면하는 작업에서 시작됐다.

 

(5) 하비밀크, 캘리포니아, 푸코

샌프란시스코에 동성애자 인구가 늘어난 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들은 징집되고 평시에 남자들이 있던 자리를 여자들이 채운다. 샌프란시스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 도시는 전쟁물자 보급의 요충지였다. 여성 취업률이 높아졌고, 군대에 갈 수 없던 동성애자들 역시 샌프란시스코로 몰렸다. 이에 더해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동성애자를 샌프란시스코에 집단이주시켰다. 2차 대전 중 강제이주는 비단 동성애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는 일본과 전쟁을 치룬다는 명목으로 미국 내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수용소에 강제수용시켰다.

아무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샌프란시스코의 동성애자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동성애 술집, 식당, 클럽, 바스 하우스 등의 게이산업이 번창했다.

 

전쟁이 끝나자 동성애 탄압이 거세졌다. 1950년대 먼저 정신의학계의 ‘동성애 병리화’작업이 진행되었다. 1952년 미국 정신의학계에서는 동성애를 반사회적 인격장애(sociopathinc personality disturbance)로 선언했고, 뒤이어 샌프란시스코의 의사들은 치료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국가권력이 신체적인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1949년 이상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로만 이워지는 섹스만이 합법이고 나머지 섹스는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동성애는 혐오를 넘어 불법이 되었다. 이 법률이 노리는 것은 동성애 섹스가 이뤄지는 장소를 불법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맞서 샌프란시스코는 공공연히 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이미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때쯤 게이 산업의 기반이 어느 정도 공고화된 이 도시에서 게이산업의 불법화가 이러한 기반을 와해시킬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동성애 인권운동이 다른 지역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발해졌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9만 여명이 동성애자들이었다. 또한 전체 도시 술집의 8% 정도가 동성애자 술집이었다. 한 잡지는 샌프란시스코의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 도시는 소수자 공동체에 대한 관용이 있다. 또한 이 도시에서는 이성애 주류사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조직해서 그 안에서 서로를 지지해주는 동무를 만날 수 있었다.”

1960년대가 되면서 외부에서 동성애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는 1940~50년대 샌프란시스코 내부의 상황도 있었지만, 1960년대 미국의 히피문화와도 맞물리는 측면이 있었다.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는 ‘히피문화 또는 반문화 Counter-Culture'의 진원지가 되면서 이 도시로 동성애자들이 찾아왔다. 1969~1973년 사이에 약 9천 명의 동성애자들이 몰려들었다. 이어 1978년까지 2만 여명의 동성애자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대거 이주했다. 마치 홍대 앞이 바와 클럽으로 성황을 이루듯 샌프란시스코 캐스트로 거리(Castro Street, 대표적인 동성애자 거리)는 게이바, 클럽, 바스하우스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프리섹스, 느, 마약 등 샌프란시스코는 점차 ’동성애자들의 환상이 실현되는 곳‘이 되었다.

 

그 가운데에 하비 밀크(Harvey Milk, 1930~1978)가 있다. 그는 1977년 자신이 게이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공직선거에 나가 당선된 최초의 인물로, 동성애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 역시 푸코처럼 10대부터 게이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어디에서든 자신을 숨겼으며(covering), 오랜 세월 자폐적인 삶을 살았다. 커밍아웃을 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매 순간 수치심과 두려움에 떨면서 ‘팬지꽃 한 다발의 비애’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법이다. 뉴욕에 살던 하비 밀크는 1972년, 43세가 되던 해에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직장을 관두고 사랑에 빠지기 위해 동성애의 상징 도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한 것이다. 그의 연인과 함께...

 

하비 밀크는 캐스트로 거리에서 카메라 가게를 열었다. 그 곳에는 손님보다 게이 활동가, 젊은 게이들이 몰려 들었다. 카메라 가게는 정치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갔고, 자연스럽게 하비 밀크는 게이 운동의 리더가 되어갔다. 어느 날 경찰이 캐스트로 거리를 급습해서 무차별적 폭행을 저질렀고, 그 사건을 계기로 하비 밀크는 1975년 샌프란시스코 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1978년 마침내 선거에 당선되었다.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미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게이임을 천명하고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원 당선 후 그는 동성애자의 최전선에서 동성애 정치투쟁을 벌였고, 49세의 나이에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암살을 당한다.

 

그의 생애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그의 역정은 특히 소수자 공동체일수록 정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만약 정부 안에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셋아을 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들여보낸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겪었던 그런 무참함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둘째, 그의 투쟁은 동성애자 뿐만 아니라 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무기임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하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게토’를 떠나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셋째, 그의 극적인 삶은 이렇게 말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바로 진실을 말하라! “우리의 어려움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해서는 안된다. 사생활을 운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적이다. 당신이 정말로 정치적인 힘을 원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며, 진실을 말해야 한다. 변화는 바로 진실을 말하는 데에서 나온다.”

 

푸코는 샌프란시스코 캐스트로 거리에서 무수한 하비 밀크를 만났다. 그것이 푸코에게는 커다란 감명이었고 충격이었다. “나는 평생 성을 연구했지 미국 게이들처럼 마음껏 성을 향유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연구가 아니라 향유이고, 향유야말로 저항이다.” 샌프란시스코 같은 게이 망명지에서 펼쳐지는 게이 문화에서 푸코는 넋을 잃고 말았다.

 

푸코가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한 것은 1975년이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16~17세기 구빈원(General Hospital)을 매우 역설적인 표현으로 ‘Heterotopia'라고 했다. 이 말은 구비원에는 정신병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 과부, 상이군인, 실업자, 고아, 거지 등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이 한꺼번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코에게 샌프란시스코 동성애 사회는 문자 그대로 마력적인 ’헤테로토피아‘였다. 프랑스 사회에서 규율되던 삶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었던 매우 이질적인 삶이 그곳에는 있었고 그것이 푸코에게는 엄청난 환희였다. 1975년 버클리대학의 초청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면서 푸코는 이전까지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맛보았고, 이런 강렬한 경험이 <성의 역사>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5년에 Death Valley에서 LSD라는 마약을 복용했을 때 충격,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게이바에서 가졌던 sm의 충격, 이런 경험은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너무도 충격적인 환희였다.

 

푸코는 1975년 이후에도, 1979년, 1980년, 1983년에도 버클리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였으며 동일한 패턴의 삶을 반복했으며 그 환희를 이어갔다. 그리고 1984년 에이즈로 삶을 마감한다. 1975년은 그래서 푸코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해다. 샌프란시스코를 만나기 전과 후의 푸코는 전혀 다른 삶과 사유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래서 단절은 누군가를 이해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6) 군자표변 (君子豹變(군자표변))

군자표변, “군자는 자신이 가는 길일 갈 길이 아님을 알면 표범이 달리던 길을 꺾듯이 자신이 가던 길을 과감하게 버린다”라는 뜻으로 썼다. 푸코는 1975년과 1976년 연거푸 <감시와 처벌> <성의역사 1>을 펴내고는 이후 8년 동안 침묵했다. 푸코는 죽기 직전인 1984년에야 <성의 역사 2,3>을 연속 출간했다. 평균 3년에 한 편씩 대작을 세상에 선보였던 기존의 푸코의 삶을 돌아볼 때 이 침묵은 놀랍다. 게다가 <성의 역사 2,3>은 기존의 저작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푸코의 데뷔작은 그가 36세에 쓴 <광기의 역사>이고 마지막 작품은 59세에 펴낸 <성의 역사 2.3>이다. <광기의 역사>를 쓰던 푸코는 동성애라는 것에는 나오는 슬픔 말고는 아쉬움 없는 엘리트였고, 동성애는 커버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성의 역사 2,3>은 확실히 다르다. 이 글을 푸코의 1976년~1984년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삶의 계열에서 탄생했다. 푸코는 샌프란시스코에 머물 때 동성애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이제 게이의 권리를 말하는 데에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게이의 삶과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It is not enough to affirm that we are gay, but we must also crate a gay life.) 바로 이 계열에서 만들어진 것이 <성의 역사 2,3>인 것이다. 국경없는 역사가. 국경없는 커뮤니케이션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