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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5월 15일 말하는 건축가.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

 

말하는 건축가는 근래 내가 봤던 영화 중 단연 최고다. 나는 건축에 대해 잘 모른다. 다만 건축이 외형의 정당성과 아름다움, 윤리적 가치와 일상적 유용성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건축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동경심은 고 건축가 정기영 선생님을 만나면서 많은 부분 깨졌다. 건축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말하는 건축가>의 초반부에서 건축가 정기용은 공무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다. 그는 안성 면사무소를 지을 때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나이 든 주민들이 목욕탕이라고 답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목욕탕을 지어준다. 안성면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지금도 이 목욕탕을 애용한다.

이어지는 장면, 자신이 지은 무주 건물들을 답사한다. 철골과 등나무의 조화, 이 조화는 자연을 배려하고, 자연과 대화하는 건축이 무엇인지를 소박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소박한 조화가 녹색성장을 앞에 내세우며 세워진 태양열 집적판에 의해 깨진다. 그가 공들여 만든 운동장 벤치에 그늘을 드리워주는 등나무 덩굴은 태양열 집적판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정기용 선생님은 거침없이 욕지거리를 쏟아낸다. “이런 게 녹색성장이라고? 내가 두 번 다시 무주에 오는 일은 없을거야. 무슨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정재은 감독은 건축가 정기용의 마지막 1년을 묵묵히 따라간다. 노년의 건축가 정기용은 우리에게 건축에 대해,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남기고 싶어 할까? 그의 마지막 말들을 남기기 위해 감독은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정기용 선생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일상적인 관찰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누구인가. 공익이란 무엇인가.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문화란 무엇인가.

한 건축가가 건축을 매개로 사람과 소통하고자 했던 지난 역사와 자본과 권력에 의해 무너지는 건축의 공간이 교차되면서, 나는 지금 어떤 자리에 서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사는 게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그래서 위엄을 가진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영화의 한 대목에서 말한다.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화려한 수사, 위장된 제스쳐, 비겁한 합리화, 돈에 대한 끝없는 욕망, 인간의 비루한 기름기를 빼고, 앙상하지만 단단한 골격과 뼈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대로 밀고 나가는 인간의 흔적을 보는 건 흥분되고 멋지다.

삶은 이처럼 위대하단 말인가? 죽음은 이처럼 아름답단 말인가?

그의 사무소와 집에서 나오는 방대한 자료의 양은 보는 사람을 질리게 한다. 기록, 고민, 사유, 그가 뿌려놓은 흔적은 거대하고 아름답다. 왜 써야하는가? 왜 기록해야 하는가?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건축가 정기용이 존재했을까? 치열한 기록은 치열한 삶을 증명한다. 치열한 기록은 내가 현실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기록의 시간, 그 고민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과 같은 불안과 욕망의 시대에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끌고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변해가는 동대문의 모습과 청계천의 모습과 광화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아팠다. 시간의 흔적이 사라지고, 오로지 돈의 논리로만 재단되어 재편되는 서울의 공간이 떠오르면서, ‘건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이 시대의 장인이 얼마나 되는지 씁쓸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문은 건축, 의료, 언론, 사법, 행정, 정치, 문화 모든 영역을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말하는 건축가>의 마지막 장면. 할머니들이 정기용이 지은 면사무소 목욕탕에서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할머니들은 누가 이 목욕탕을 지었는지 아느냐는 물음에 모른다고 답한다. 그 다음 장면, 면사무소 앞 계단 근처에 정기용이 사람들 틈에 끼어 조용히 앉아 있다. 자기 정체를 굳이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자세.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태도는 내가 도드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함께 했던 공간이 비추어내는 인간다움의 흔적과 사람 냄새에 동참하는것, 연대하는것, 그리고 이 소중한 흔적들과 가치들을 일상의 주름 속에 끌어내는것.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하게 되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그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다”며 칠판에 눌러쓴 문장 자신이 사는 조그만 다세대 주택 빌라의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햇살에 감탄하는 모습. “햇살도, 바람도, 나무도 감사합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목소리.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듯 싶다.

이런 기억을 남겨준 정재은 감독에게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