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스쿨/미디어 놀이터

유쾌한 수상식, 그랑프리와 토크쇼


<유쾌한 수상식, 그랑프리>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봤다.
"KBS를 대표하는 집단 토크쇼! 세상에서 하나뿐인 재미있는 시상식이 펼쳐진다! 기존 토크쇼처럼 무분별한 게스트 섭외가 아닌 공통적인 집단성을 지닌 기획 섭외를 통해 중장년층부터 현 세대까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토크 시상식’을 개최한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다.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고 드는 즉각적인 감정.
허참, 송해, 남희석, 왕영은, 김병찬, 왕종근, 이창명,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방송인들의 어제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재미, 조금은 쏠쏠하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고, 몇 가지 컨셉으로 구성한 제작진의 노력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조금은 허하다는 느낌. 뭘까? 이 프로그램이 과연 KBS를 대표하는 집단 토크쇼가 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어떤 맥락에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토크쇼에 대한 전반적인 리뷰가 필요하다. 하여 오늘은 비도 오고, 그러니 기존의 토크쇼를 전격적으로, 오랜만에 파헤쳐보면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모니터를 개인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랑프리>는 복고를 TV로 재현한다는 맥락에서 MBC의 <추억이 빛나는 밤에>와 비슷하고, 집단 토크쇼라는 측면에서는 <강심장>, <세바퀴>와 비슷하며, 공통적인 집단성을 지닌 기획 섭외를 지향한다는 맥락에서는 <놀러와>와 비슷하다.

1.


우선 <추억이 빛나는 밤에>. 이 프로그램의 컨셉은 게스트의 추억을 시청자에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왕년에 말이야’ 이 말로 시작되는 거다. 이 말이 소통되기 위해서는 MC의 역할이 중요하다. MC가 게스트와 시청자를 매개하는 중개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컨셉의 경우 MC의 개인기나 캐릭터보다 이들이 얼마나 게스트와 화학작용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시청자가 궁금해 하는 것을 꼬집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 프로그램은 실패한 프로그램이다. 류시원, 이경실, 이홍렬, 김희철, 이 네 명의 캐릭터와 역할 구분은 모호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능력을 경쟁할 수밖에 없거나, 작가가 배분한 도식적인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으며, 이 구도 내에서 게스트의 재미와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프로그램이 <해피투게더>다. 목욕탕이라는 배경에서 MC들이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성 잽을 날리고, 상황극을 펼치면서 방송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유도한다. 유재석, 박명수 등 고정 MC들은 서로에게, 게스트들에게 짖궂은 잽을 날리면서 출연자들의 긴장을 풀어준다. 유재석이 진행하고, 박명수가 찌르고, 박미선이 거들고, 신봉선이 큰 리액션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목욕탕에서 게스트들은 솔직한 자신만의 이야기와 장기를 풀어낸다. 조그마한 동네 목욕탕에서 찜질방 옷을 입고 목욕 의자에 앉는 순간 해피투게더 사람들은 함께 수다를 떨고 웃는다. 할리우드의 스타든, 가요계의 여신이든, 쪼그리고 앉아 수건을 쓰면 다 친구가 되고, 그만큼 솔직하고 수다스러운 토크 버라이어티인 것이다.

<그랑프리> 역시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내, 오늘의 시청자에 드러내고자 한다면, 출연자 스스로가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 그랑프리라는 조금은 공적이고, 스펙터크한 장치 속에서 이것을 끌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왁자지껄함이 그랑프리라는 공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할 때, 그것에 솔직하고, 소박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미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랑프리>는 후반으로 갈수록 게스트들이 흥미를 잃고 졸음에 빠진다. 마치 진짜 시상식장처럼... 게스트들이 조는데, 시청자들이 즐길 수는 없는 법.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랑프리 수상식을 작고 소소한 수상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게스트들로부터 끄집어 내기 위해서는 출연진의 숫자도 줄일 필요가 있을 법하다.

2.


이 프로그램은 기획 섭외를 지향한다는 맥락에서 <놀러와>와 유사하다. MBC의 <놀러와>는 게스트를 특정 주제로 묶어 그에 대한 대화를 끌어내는 포맷이다. 서로간의 화학작용으로, 웃기지 않아도 웃게 만든다. 가령 데뷔 27년차 이선희가 억지로 망가지지도 과거의 자극적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그저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아들 같은 이승기와 홍경민과 정엽이 옆에서 웃음을 만들어준다. 유재석, 김원희, 김나영도 개구쟁이같은 눈빛과 질문으로 깨알같은 재미를 덧붙인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은 게스트들에게 예능감 풍부한 발언을 요구하기 보다는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정중히 부탁한다(이와 관련하여 최근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아이템은 세시봉 특집과 성우 특집). 말하기 위한 말, 웃기기 위한 말이 아니라, 보는 사람도, 초대된 사람도 한판 즐겁게 노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수다가 이 프로그램에서는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친하거나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이 함께 나와 서로를 조력하도록 만들어내는 구성 때문일 것이다. 독특한 공통점을 가진 스타들을 초대하여, 소개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끄집어 내는 <스타 IN 커버스토리>에서, MC들과 게스트들의 친밀도가 높아지고, 이야기와 수다의 차원이 확실히 달라지게 만드는 <골방토크>로 이어지는 구성, 이야기들이 잘 안 풀릴 때 기댈 수 있는 조커 이하늘과 길, 그리고 김나영의 존재는 <놀러와>를 재미있게 만드는 틀거리다.

<그랑프리>도 과거의 KBS 예능 콘텐츠를 배경으로, 이런 게스트 섭외와 구성이 가능하다. 유머1번지를 함께 했던 개그맨들, 90년대 가요 TOP10을 풍미했던 경쟁자들을 함께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재미의 30%는 기존 영상 화면에서 오는 것이지만, 70%는 이들이 서로 간에 만들어내는 시너지 토크에 있을 것이다. 최근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프로그램이 임하룡 편이었다. 몰래 온 손님으로 출연한 김학래, 이경애, 조금산 등 80년대 KBS의 코미디를 이끌던 개그맨들이 펼쳐내는 수다와 티격거림은 기막히게 즐거웠다. 이것을 어떻게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왜 <놀러와>가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골방토크’를 <해피투게더>가 ‘목욕탕토크’를 차용했는지 주목해야 하는 바다. 화려한 스튜디오 배경, 그랑프리 배경으로는 그런 토크가 불가능하다.

3.
마지막으로 <그랑프리>의 정규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집단토크라는 형식을 버려야 한다고 본다. 집단토크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세바퀴>와 <강심장>이다. 20명 이상의 연예인과 토크를 하는 이 프로그램들은 짧고 압축적이며, 단시간에 주목을 끌 수 있는 이야기가 중시된다. 그런 측면에시 이 프로그램들은 0과 1로 압축되는 디지털 문화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인터넷 커뮤니티에 웃기는 이야기와 슬픈 이야기, 야한 사진과 클래식이 공존하는 것처럼 <세바퀴>, <강심장> 등은 그 자체로 수많은 종류의 즉각적인 즐거움을 전달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강심장에서 강호동과 이승기는 포털 뉴스의 에디터다. 수십명의 게스트들은 번호표를 들고 웃기기를 기다리는 콘텐츠 프로바이더다. <세바퀴>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 30대 이상을 타깃으로 하는, 입담을 자랑하는 주부들을 위한 생활밀착형 퀴즈 오락 프로그램이었지만, 지금은 집단 토크와 누가 더 웃길 수 있는지를 경연하는 장기 경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그랑프리>는 디지털 문화의 특성을 반영하는 <세바퀴>와 <강심장>에 대척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아날로그적 감수성이다. 이 감수성을 배태하는 그릇이 포털사이트와 같은 집단토크가 된다면 아날로그도 디지털도 아닌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4.
토크쇼의 역사를 보면 <자니운쇼>처럼 한 사람을 불러서 이야기하는 정통 토크쇼에서, 쟁반 노래방, 상상플러스와 같은 게임 토크쇼, 스타들의 모든 것을 가감없이 이야기하는 무릎팍도사, 라디오스타, 해피투게더로 진화해갔다. 이렇게 변한 것은 TV가 다른 플랫폼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청자들이 궁금해하지만 인터넷 등에서 다룰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진정성과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또는 이제 잊혀진 사람들, 또는 쉽게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드러나지 않던 사람들과 이야기의 복원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쾌한 수상식, 그랑프리>는 TV만이 가진 기존의 콘텐츠와 TV무대를 주름잡던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차원에서 차별화된 어떤 예능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찌보면 내용이 아니라 그릇일 것이다. 어떤 그릇에 담을 것인가? 그랑프리쇼인가, 아니면 찜질방인가, 디지털적 감수성인가, 아날로그적 감수성인가.. 꼭 세상 일이라는 게 이렇게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밥에 어울리는 그릇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참고> 내가 좋아하는 토크쇼.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 날카롭지만,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독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게스트들의 인생을 따라가며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편안한 이야기까지 끄집어내고자 했고, 완벽하게 끄집어 내고 있는 프로그램, 게스트와 일대 일로 만나 게스트 자신을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드는 장치들 (점집, 도사)과 게스트의 모든 것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MC 강호동의 집요함과 경청 능력, 게스트를 도발케 하는 건방진 유세윤 등이 이 프로그램의 장수를 가능케 하는 무기다.


<Mnet의 비틀즈 코드>, 나비효과, 메기효과, 작용 반작용 법칙, 삼단논법으로 확장하고자 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던 평행이론의 힘을 이용한 뮤지션 중심의 리얼 토크 버라이어티. 게스트들도 감지하지 못하는 공통점을 제작진이 발굴하여 ENG물을 제작하고, 그것을 매개로 토크를 이어나간다. 녹화 현장의 재미와 궁금증을 증폭시키기 위해, MC나 게스트들에게 미리 VCR을 보여주지 않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출연자들이 준비한 자료화면을 두고, 아니다, 맞다 떠들면서, 리얼 토크 버라이어티가 진행된다. 음악전문채널의 차별화된 색깔과 새로움이 물씬 묻어나는 토크쇼.


<라디오스타>, 이 토크쇼의 간판은 고품격 비주류 방송. 주류에서 밀려난 김국진, 주류가 못 된 윤종신, 주류가 싫어하는 김구라, 한때는 주류였지만 이제는 노땅이 된 김희철. 이들 MC는 게스트들에게 돈, 스캔들, 싸움을 비롯한 각종 루머를 태연하게 던지면서 분위기를 만든다. 톱스타보다는 한물간 톱스타, 잘나가는 그룹의 인기순위 꼴찌들을 환영하는, 라디오스타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고, 그래서 이 토크쇼에서는 모든 추잡했던 과거들, 부끄러운 그림자들이 모두에게 가벼운 웃음으로 승화된다. 게스트를 몰아붙여 정신없이 웃음을 주는 기조, 조금은 지독해보이지만, 세상만사 모든 슬픔, 아픔, 상처, 굴곡을 웃음으로 만들 수 있는 쇼. 진짜 재미는 아무리 말하기 힘든 과거라도 아무렇지 않게 슬쩍 웃음으로 끌어내고, 한물간 인기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뻔뻔한 자세가 나는 좋다. 뭔가 가벼움 속에 인생의 아픔을 극복하는 어떤 철학이 있다고 할까? 두서없는 질문, 들쭉날쭉한 방송 시간, 고품격 비주류 방송이라는 자기 선언을 통해 시작하여, 다음주에 만나요 제발!로 끝나는 구성, 이 모든 것이 어찌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찌질이의 삶을 재현하고, 위로하는 것 같아, 좋다. 이것은 시대를 반보 앞서간 토크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