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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미디어 놀이터

송재호, 선유용녀 (사랑을 믿어요)



송재호. 나는 정년을 1년 앞두고 있는, 만년 교감이다. 얼마나 만년이라고 하면 10년째 교감 선생님이다. 내 인상을 보면 알겠지만 난 사람 좋음의 대명사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다. 내가 만년 교감인 것에 대해 어머니도 아내도 딱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 다 그 사실을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오늘도 나는 하얗게 늙으신 어머니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아내에게는 "다녀올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그러면 또 나는 만년 교감선생님이 된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출근을 한다. 오늘 아침은 공기도 좋고, 유난히 햇살도 눈부시다.

선우용녀. 나는 만년 교감의 아내다. 해질 무렵, 마당의 나무와 화초들에게 물을 주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남편 학교에서 교직원 부부 모임이 있는 날이다. 어머나!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옷을 갈아 입으려고 옷장문을 열지만 당연히 입고 갈 옷은 없다. 명색이 교감 아내인데, 옷은 교감 아내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무하고 꽃한테만 정신 팔지 말고, 내 아들한테도 정신을 좀 팔어라" 하는 시어머니 퉁박을 겉옷처럼 꿰고 남편 학교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학교 복도에서 그 짧은 다리로 방방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제 오는 거야! 자꾸 이러면 내가 마당에 나무들 다 뽑아 버린다" 남편은 이럴때면 꼭 어린애 같다. 어린애 같은, 사람 좋은 남자와 살아온 시간. 그 시간의 두께 속에 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과 수많은 나무들과 꽃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만하면 행복하다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