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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어느 여름 날, 빈의 거리에서



미사를 마치고 성슈테판 성당을 나오니 오전과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그러니깐 이 거리는 빈 관광의 핵심공간인 듯 싶다. 우리로 치자면 명동성당 즈음 되는 느낌? 수많은 관광객으로 거리는 발디딜틈 없었고, 태양의 온도는 뜨거웠으며, 콘서트 티켓을 파는 청년이 거리 곳곳에서 관광객과 흥정 중이었다. 한 대학생을 만났다. 의심이 많은 우리는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밝은 웃음, “안녕하세요? 전 음악대학교 학생입니다. 오늘 저녁 좋은 공연이 400년도 더 된 궁전에서 있어요. 한 번 보지 않으실래요?” 이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모습, 어떻게 한국어를 이렇게 한단 말인가? 게다가 당당함과 여유를 잃지 않는 표정, 자신이 세일즈를 하고 있는 공연에 대한 무한 애정의 느낌, 이 느낌은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해져 지갑을 열게 만든다.

 


티겟을 예매한 후, 빈 구시가지의 중심지인 슈테판 광장을 떠나 골목으로 들어간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1140년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을 시작해 1359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고딕 양식으로 개축했다고 한다. 내부도 그렇지만 외부도 역시 인간을 압도하는 특징을 보인다. 137미터에 달하는 첨탑,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 타일, 이 타일은 보는 시간, 각도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몇 컷의 사진을 찍다 우리는 몰려드는 인파에 다소 피곤함을 느끼며 골목 그늘진 곳으로 들어선다. 맥주 한 잔을 노천 카페에서 마신다. 좁은 골목, 태양이 오래된 건물을 만나 만들어낸 그늘은 골목을 길고 넓게 감싸고 그 사이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삶의 갈증을 한 방에 해결하는 청량함 그 자체였다.



맥주 두 잔을 헤치우고 다시 뜨거운 태양으로 나선다. 다음으로 우리가 향할 곳은 프로이트 하우스. 프로이트 하우스로 가는 길은 호프부르크 광장을 지나 Volks 가든을 넘어 국회의사당과 시청사를 지나 빈 대학 안쪽까지 가야 하는 길.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7월 마지막 주 오후 2시 빈의 태양은 예상했던 것만큼 뜨거웠다. 호프부르크 궁전은 아침에 우리가 본 이상으로 웅장하고 거대했다. 궁전을 둘러싼 정원과 건물의 심도는 굉장히 깊었고, 그만큼 발걸음 역시 더디게 나갔다.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시대를 훌쩍 뛰어 넘어 19세기에 만들어진 국회의사당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하는 모습이다. 19세기 후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설계자의 바람이 의사당에 녹아져 있다(그만큼 오스트리아 내부에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건물의 정중앙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동상이 있다. 왼손에는 창을 들고 오른손에는 승리의 신 니케를 들고 있다. 이 조각상은 당시 활동중인 분리파 클림트의 그림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클림트의 그림에는 아테네가 좀 더 팜므파탈적으로 그려진다. 좀 더 나아가 승리의 여신 니케는 <누다 베리타스(벌거벗은 진실)>에서 붉은 음모, 진한 관능미, 자극적 누드로 표현된다. 국회의사당, 시청, 프로이트 하우스, 레오폴드 뮤지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19세기 후반의 빈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세기말로 표현되는 그 시절의 빈, 그 시절 여기에는 쟁쟁한 천재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독특한 사상과 삶을 구축하곤 했다



프로이트, 바그너, 코코슈카, 에곤 쉴레, 비트겐슈타인 등등. 빈 체제의 몰락으로 왕가가 힘을 잃은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 지식인들은 살롱과 카페를 매개로 정치학, 문학, 심리학,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동시적으로 전선을 형성한다. 지금 우리는 그 전선이 만들어진 거리를 걷고 있는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거리를 떠올리며 2018년 서울의 전선을 생각해본다. 2018년 서울은 어떻게 기록될까?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예술의 자유를! 그것을 이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거다. 우리 모두에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프로이트 뮤지엄. 대학 거기의 한 구석에 자리한 공간으로 한 낮의 거리는 한산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뮤지엄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계단을 빽빽이 채우고 있다. 말이 박물관이지 그냥 사무실 건물 같은 곳인데 프로이트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 시대의 관심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한 시간 정도 그곳에서 기다린 다음 들어선 프로이트 집무실. 여기에는 그가 환자를 보던 진료실, 환자들이 대기하던 대기실, 가장 인상깊던 것은 당시 그가 모아 놓은 갖가지 수집품들, 고전문학과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박물관에서 수많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자신의 삶과 학문에 미친 영향을 재현해 놓은 느낌이다.


프로이트는 어디에선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자는, 고고학자가 그러한 것처럼, 가장 깊숙한 곳의 진귀한 보물을 발견해 내기 위해 환자의 정신세계를 층층이 발굴해내야 한다.” 그의 집무실들은 그 발굴에 영감을 주는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했다. 이곳에 프로이트는 1891년 늦여름에 이사와 47년을 살았다고 한다. 유대인이던 그가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 생애를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곳에서 낮에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밤에는 꿈에 대해 연구했다. 정신분석학이라는 기둥은 진료실에서의 상담치료와 서재에서의 연구 분석의 결과로 얻어진 거였다. 꿈을 왜 꾸는 것일까? 꿈은 소망을 표출하는가? 무의식의 바다인 꿈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꿈의 해석을 완성한다.



이 연구실과 함께 그의 삶과 학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공간은 란트만(Landman)이라는 카페다. 여기서 그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람들을 구경하며 머릿속에 자신의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몰입할 것이 있고, 좋아하는 공간이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이 있을까? 어찌보면 인간답게 사는 데에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하면 좋은 것 중 하나가 하루가 참 길다는 것, 이즈음 되면 사실 하루가 끝나야 하는데 아직도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 길다는 것은 참 좋지만 시차적응이 안 된 첫 날, 무더운 날에 숙소를 옮기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조금은 무리수였다. 프로이트 뮤지엄에서 나와 가까운 지하철을 찾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번의 오류, 날은 더웠고 구글과 현실 사이에 혼돈을 느꼈으며 자주 길을 잃었다. 그러니깐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길인데 지하철을 잘못 타고, 버스를 탈 엄두는 아예 내지 못해 거의 한 시간 넘게 헤맨 상황. 플랫폼 벤치에 축 쳐져 앉아 있는데 더위에 지친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많이도 지나간다. 독일어는 봐도 봐도 외우는 게 참 쉽지 않다.


짐을 찾아 두 번째 숙소 Das Capri에 도착한 후 우리는 더위와 피곤함에 쓰러졌다. 밥을 먹을 기운도 없었다. 만약 콘서트 티켓을 예약하지 않았으면 그 날 일정은 그걸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녁 815, 마지막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왈츠의 대가 요한스트라우스와 모차르트 교향곡의 협연, 공연인 Volkstheater 근처에 자리한 Johannegasse 33, 400년 궁이었고, 모차르트가 6살 때 초연한 공간이기도 했다. 호텔 리셥센에 물어 찾아가는 방법을 확인한 후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 Volk 역에 내린다. 역 근처는 오후에 마주했던 국회의사당, 시청사, 시민정원이 있는 곳이다. 너무 더워 보이지 않던 하늘, 잔디, 사람들의 움직임이 해질 무렵에서야 눈에 새겨진다. , 확실히 빈은 모델급의 여성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공연장 쿠어살롱(Kursalon)은 시민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1층부터 2층까지 빨간 카펫이 계단을 수놓고 있고, 천장이 높은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 사실 르네상스 스타일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리스의 조각과 건축을 차용한 건물 자체가 아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건물이다. 1층과 2층 사이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한다. 콘서트용 옷을 맞추어 입고 온 연인도 있고, 중국 관광객 같은 사람들도 있다. 멀리서 음악이 들려온다. 아마도 전 공연의 피날레인 듯싶다. 오케스트라가 매우 자극적이고 뜨겁다는 생각을 한다.


막상 마주한 공연은 흥미로웠다. 바이올린을 켜며 지휘를 하는 잘 생긴 남자, 끊임없이 주변 동료와 눈을 맞추며 시간을 즐기는 바이올리니스 털보 아저씨, 뚱하게 클라리넷을 부는 남성 3인방, 마네킨처럼 생긴 삐쩍 마른 발레리나, 파리넬리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멋진 테너와 소프라노, 배도 넓고 목소리도 깊다. 그리고 흰 머리의 할머니 피아니스트, 도도하고 자신만만하게 그 큰 현악기를, 아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50대 즈음의 여성, 한 번도 웃지 않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곡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40대 즈음의 여성, 이 여성은 연주 도중 첼로를 휙휙 돌리며 나름의 진기명기를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휘자, 그는 끊임없이 눈을 맞추고, 말을 걸고, 시종일관 여유있는 모습으로 즐기는 모습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곡이 끝날 때마다 하는 인사, 그 곡의 메인 주인공에게 관객이 박수를 치면 주인공은 그 박수를 뒤에서 연주한 연주자에게 돌린다. 그 의례, 형식이 오케스트라를 고급지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날 연주된 모차르트와 스트라우스 음악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쏟아지는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