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도시 한 자락의 아침은 조용했다. 호텔의 조용함은 로잔에서는 예외적이다. 호텔 밖을 조금만 나서면 도시는 시끄럽고 분주하다. 들떠있고 생기 넘친다. 이곳은 즐길 것, 볼 것, 먹을 것은 많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난다. 1박 2일의 로잔 여행. 아마 다시 이곳을 방문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러나 이 시간과 장소는 내 마음 속에 새로운 감정과 무게를 더해간다. 이 무게를 굳이 하나의 개념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움의 기운인 듯싶다. 로잔은 산만하고 분주하다. 무언가 무질서해 보이고 남녀노소 모두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고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혼착되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기에는 불편함이 없다. 그냥 생명력이 넘치고 활기에 찬 느낌이다. 물론 사람이 많다보니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길 위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분명 서울의 분주함 속에서 마주한 눈빛에 비하면 빛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흐리멍텅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다는 거다.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담배를 피워대는데 묘하게도 서울보다 메퀘하지 않다는 게 신기하다. 오히려 그 담배 연기가 자유의 표상이라 여겨지는 것은 뭘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여행지에서 구석진 골목길에서 담배 한 대를 피는 일은 의외로 쏠쏠한 재미다. 특히 로잔에서 묶었던 호텔은 뒷골목 한 자락에 자리한 터라 이 재미가 더욱 컸다. 도시와 골목 마다 독특한 냄새와 느낌이 있고 가만히 10분 정도 그 자리에 있다 보면 그 느낌이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들어오기 마련이다. 길모퉁이의 전봇대, 작은 레스토랑, 지나가는 고양이, 보도블록의 질감, 좁은 골목, 작은 빵집, 쓰레기통, 일렬종대로 새겨진 촘촘한 창문, 맥주를 마시는 동네 아주머니, 키스를 하는 연인, 이 모든 것이 화려한 빛깔이 아니라 무채색으로 그려진 곳, 내게 로잔은 그런 느낌으로 자리하고 있다. 뒷골목의 다양성과 무채색의 여백이 자유로움으로 읽혀지는 공간, 그곳이 바로 로잔인 것이다.
체크아웃을 하면서 가방을 리셉션에 맡겨두기로 했다. 오전에 우리의 일정은 라보지구 마을 트레킹이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라보 포도 재배지역은 로잔과 몽트뢰 사이에 위치하며 ‘세 개의 태양’이 자리한 지역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늘의 태양, 레만 호수가 머금은 태양, 그리고 포도 경작지에 머금은 태양.
로잔 역에서 10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라보 지구 마을의 한 자락 퀴리(Cully)역에 도착한다. 로잔이 시끄럽고 분주한 도시라면 퀴리 마을은 그와 대비되게 과도하게 조용한 곳이었다. 기찻길 옆으로 포도밭이 넓게 퍼져 있고 그 앞으로 레만 호수가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스위스에 가면 꼭 라보지구에 가보라고 한 선배가 이야기해주었는데 퀴리 마을을 걷는 내내 강력 추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픈 다리를 끌며 언덕을 오르고 내려야 했는데 그 상황에서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럴 생각을 할 여백을 태양은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의 태양볕이 뜨거웠고 포도밭에는 그 빛을 피할 음지 한 켠 찾기 쉽지 않았지만 바로 그 태양빛이 이 공간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체르마트에서 느낀 감동이 육감적이고 정념적이며 묵직한 음악 같다면 라보마을에서 느낀 감동은 부드럽고 순수하고 달콤한 선율이었다.
오전이라 그런지 와이너리를 돌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도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이 마을에 상당한 매력을 느낀다. 아름다운 호수, 조용함, 좁고 예쁜 골목길, 창문마다 자리한 화분에 핀 꽃. 태양의 기울기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는 그림자, 녹색의 창문창, 신발 사이로 느껴지는 돌길의 촉감, 빨간 튤립, 고즈넉한 가로등, 이곳에 있으면 많은 면에서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아침이면 포도밭을 가꾸고, 저녁이면 동네의 작은 카페에 앉아 레만호수를 마주하며 와인 한잔을 즐기지 않을까? 봄, 여름에는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고 가을, 겨울에는 여유있게 한 해의 결실을 매듭짓지 않을까? 낮에는 태양의 찬란함 속에서 밤에는 별의 향연 속에서 마음 속에 자리한 달콤한 포도 한 송이씩 가지고 있지 않을까? 스위스가 전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포도밭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걷고, 포도밭과 포도밭 사이에 자리한 작은 마을을 건너고, 골목길 사이에서 수많은 사진 찍기 놀이를 하고, 포도밭과 레만호수가 보이는 작은 벤치에 앉아 쿱에서 산 와인 한 잔을 홀짝이며 우리는 오전의 짧은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에 포도밭 사이를 뛰어가는 마라톤 러너를 만났다. 그는 이번 주말에 체르마트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고 한다, 마을 가운데에 자리한 공동묘지 한 비석 앞에서 물을 주고 꽃을 갈아주는 할머니도 만났고, 제주도의 간판인 올레길 표지도 만났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이 태양의 공간에서 공존하고, 체르마트와 라보마을은, 라보마을과 제주도는 이렇게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제주도 올레길에 한참 빠졌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파란 하늘, 시원한 바람, 조용한 분위기, 그리고 삶과 가까이 있는 무덤과 걷고 달리는 사람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파란 레만 호수와 파란 하늘이 거의 비슷한 질감으로 보인다. 선명한 여름 햇살을 받아 집들의 지붕과 포도밭의 녹색은 더 반짝반짝 빛난다. 평안한 마을이고 평화로운 아침이다. 바람도 한 점 없다. 이럴 때 시원한 맥주 한 잔 있으면 딱 좋을 테지만 문을 연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몇 개의 언덕과 마을을 지났을까? 우리는 또 다른 간이역 에페스(epesses)역에 도착했다. 거기로부터 다시 퀴리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레만호수를 앞에 둔 공원 길이었다. 우리는 레만호수에 한참동안 발을 담갔고, 커다란 소나무 밑자락에 한참을 누워있었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꾸벅꾸벅 잠들어있는 공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에 작은 요트가 정박하여 물결의 흐름에 휘청휘청 흔들린다. 호수에 수영을 하러 모인 몇몇의 사람들과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이 모여 시간으로부터 멀어진 이 공간의 색깔은 점점 더 짙어진다. 라보 마을의 세계는 내가 거주하는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게 매우 조용하고 평안하고 성립되어 있었다. 그 배경에는 찬란한 태양, 포도밭, 그리고 호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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