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로 지쳤던 마음은 깊은 잠을 초대한다. 새 몇 마디가 침대 위를 붕붕 날아다닌다. 창 밖으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고 나는 침대에 누워 몇 분째 새의 지저귐과 바람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 푹 삶은 콩나물처럼 완전히 골아 떨어진 어제 밤의 피로를 뒤로한 채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가만히 누워 조용히 하루를 시작한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줄곧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욕망한다. 과도하게 음주한 다음 날 아침이면 또는 밤새 불면의 고민으로 잠을 설친 아침이면 나는 커피 한 잔으로 과도하게 달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신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과도하게 몸을 움직인 어제의 기운을 충전하는 매듭으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 몸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지던스를 나와 작은 하천을 낀 마을 거리를 걷는다. 아침의 체르마트는 한적했다.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저 멀리 마테호른을 마주하며 제 각각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커플, 개를 앞에 세우고 조깅을 하는 아주머니, 청소부 같은 옷을 입고 전기자동차를 몰며 쓰레기를 치우는 청년, 여행가방을 끌고 다음 여행지로 숨가쁘게 떠나는 여행객들, 이들을 비추는 아침 햇살과 푸르른 하늘과 알프스 산맥. 스위스 시골의 한 화가가 작품의 한 소재로 삼을만한 평화롭고 따뜻하며 친근한 아침 풍경이다.
작은 베이커리에 들어가 커피 두 잔과 크라샹 몇 개를 아침으로 산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크라샹을 오물거리는데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의 긴장과 힘듦이 체르마트의 아침 풍경으로 모두 덧칠해진 느낌이라고 할까? 여러 각도에서 평화롭게 바라본 풍경에는 평화, 아름다움, 청정, 상쾌함 같은 단어로 충만하다.
“행복해.”
그녀의 말에는 어떤 과장도 허위도 없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그녀와 나는 체르마트 골목 골목을 산책한다. 수백년의 시간이 쌓인 전통목조가옥, 이를 샬레라 부른다고 하는데, 이 가옥들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예스러운 좁은 골목은 예기치 않은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스키시즌이 되면 이 가옥들과 거리가 수많은 스키어들로 붐비겠지만 비수기인 여름 아침의 체르마트 골목은 평화로운 햇살, 알프스 산맥과 햇살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 갈색의 목조건물, 회색의 돌담길, 빨간색, 하얀색 꽃이 핀 화분, 샬레 한 켠에 빽빽하게 쟁겨진 땔감용 나무로 독특한 광경을 펼쳐낸다. 과연 이 정도의 가옥과 땔감으로 산악에서의 겨울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의문도 들지만 이러한 의문을 불러 일으킬만큼 변하지 않는 공간의 풍경을 보면서 그 보존성에 놀라움과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고마움의 저변에는 묘하게 애달프고 싸늘한 분위기도 있다. 평화롭고 행복하지만 왠지 고독하고 싸늘한 느낌의 분위기가 나는 체르마트의 한 골목에서 깊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 태어나서 먹고 사랑하고 싸우고 죽은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춥고 배고프며 척박했을까? 내가 만들어낸 관념이겠지만 샬레라는 수백년된 알프스의 전통가옥을 마주하며 나는 아름다움보다 쓸쓸함을 더 느낀다.
그 기분을 뒤로 한 채 숙소로 돌아와 우리는 테라스에서 마테호른을 마주하며 어제 저녁 먹다 남은 치즈를 안주삼아 와인을 홀짝거린다. 아침부터. 둘 다 와인 애호가는 아니지만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과 눈 쌓인 알프스 정상과 푸른 녹음을 마주하다보면 냉장고에서 잠자고 있는 와인을 흔들어 깨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까마귀와 헹글라이더를 탄 여행객의 소리가 공존하고 저 멀리 푸른 녹음 사이에 하얗게 자리한 양들은 쇠방울 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오전 11시, 반야와 나는 헹글라이더에서 울려 퍼지는 환희, 양들의 목에서 딸랑거리는 소리, 전기자동차에서 나는 기계 소리, 저 멀리 마테호른을 넘어 불어온 듯한 바람을 뒤로 한 채 하이킹을 시작했다. 이른바 5개 호수의 길. BBC에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트레킹 코스라 알려진 이 코스는 내가 체르마트에서 가장 기대했던 길이며 그 길 위에서 나와 죽기 전에 경험해보지 않아도 될 감정과 사건을 경험한다. 이야기는 수네가행 열차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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