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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체르마트로 가는 길



베른에서 체르마트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중간에 비스프라는 곳에 한 번 갈아타야 하고 총 이동 시간은 2시간 30. 취리히에서 베른으로 오는 기차 위에서도 느꼈지만 확실히 스위스의 시골은 아름답다. 같은 시골이라 해도 느낌은 매번 달라진다. 베른에서 비스프로 가는 기차 위에서 마주한 풍경, 비스프에서 체르마트로 가는 기차 위에서 마주한 풍경은 아름답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함을 내포한다.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라고 하면 지금 이 순간 대답하기가 곤란하지만 아무튼 확실히 다른 것이다.



베른에서 비스프로 가는 길 위에는 스피츠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사실 기차를 탈 때만 하더라도 이 마을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러나 기차 뒤편으로 사라지는 옥빛 색깔의 호수와 하얀 요트와 때론 가깝게 때론 멀리 펼쳐지는 알프스 산들의 절경을 마주하면서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정차한 역의 이름이 바로 스피츠였다. 스피츠는 튠호수를 끼고 있다. 그러니깐 기차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호수의 이름이 튠이었던 거다. 기차는 튠호수를 배경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창밖의 풍경은 심도가 깊다. 바로 앞에는 녹색의 잔디와 작은 오솔길이 펼쳐져 있고 중간 즈음에는 옥빛 빛깔의 푸른 호수와 그 위에 점점이 떠있는 크고 작은 요트들이 보이며 그 뒷편으로 첩첩으로 산들이 그려져 있다. 그 산의 끝에는 융푸라우로 추정되는 산이 하얀 구름과 함께 우뚝 솟아 있고 창 밖 풍경의 1/3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으로 채색되어 있다. 베른, 스피츠, 비스프로 이어지는 기차에서 마주한 풍경은 마치 아침 이슬을 머금은 상큼한 여신을 만난 느낌이었다.



비스프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체르마트로 가는 길에서 마주한 풍경이 만들어낸 정서는 이와 조금 달랐다. 그것은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가 사는 공간으로 들어갈 때 느낄 것 같은 숭고미와 남성미 비슷한 어떤 것이었다. 기차가 고도 1620미터에 달하는 체르마트 역에 가까워질수록 마주하는 산은 가팔라진다. 기차가 조금만 옆으로 기울어져도 바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풍경이 이어지고, 산의 정상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면 거의 90도 가까이 고개를 들어 올려야 한다. 그렇다고 가는 길이 아주 무섭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열차는 산위에 짙게 드리워진 산그림자와 구름이 산 중턱까지 드리운 산촌을 끼고 천천히 달린다. 자주 비좁은 암벽 사이로 기차가 힘겹게 들어가는 듯싶고, 목조로 지어진 마을 가옥들은 거친 날씨에 대비하는 방편인지 무겁고 납작한 돌들이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비스프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모녀들은 연신 카메라 셔텨를 눌러댔다.

처음 배낭여행이에요. 딸이 대학 4학년인데 마지막 기회라며 같이 가자고 해서 온 거에요.”

“30일 정도 여행하려구요. 그래서 짐이 많아요. 여기 오기 전에 체력도 키워 놓아야 한다 해서 열심히 운동도 했어요.”

스위스가 첫 번째 여행지인데 너무 좋아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까지 여행하고 돌아가려 해요. 시간이 부족하니 하루에 2군데 트레킹을 다니기도 했어요. 전 피르스트가 참 좋더라구요

어머니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아버지도 생각났다.가족이란, 그렇게 늘 내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존재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생각나고, 좋은 곳을 오면 또 생각나고. 특히 비스프에서 체르마트로 가는 기차 위에서 나는 자주 엄마를 떠올렸다.


체르마트에 도착했다. 기차역에는 다양한 언어로 반갑습니다가 쓰여져 있다. 역을 나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마테호른이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의 오프닝 이미지이기도 한 이 삼각형 모양의 봉우리는 내가 스위스에 오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였다. 흰 구름 사이에 자리한 마테호른을 마주하자 그냥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아하는 감탄사가 아니라 피식하는 웃음. 뭐라고 할까?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새나 나무나 풀이나 꽃처럼, 그것은 체르마트의 세계를 형성하는 한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역 앞에는 성냥갑처럼 생긴 전기자동차가 서 있다. 여기는 청정마을을 보존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휘발류 차량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해놓고 있다. 마을에는 전기자동차와 마차만 다니고, 역 앞에는 승용차 대신 각 호텔이 운행하는 전기자동차만 듬성듬성 서 있을 뿐이었다. 관광지인만큼 배낭을 맨 사람들로 역 주변은 붐볐고 나는 그 붐비는 역전 앞 광장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렇다. 여기는 세계청정마을 체르마트인 것이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전기자동차의 웅하는 소리가 들리고 일본 단체 여행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해가 안 졌어.”





시계는 저녁 8시를 향하고 있지만, 우리의 몸은 새벽 3시쯤 된 기분이다. 그리고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다. 피로함이 몰려든다. 우리가 묵기로 한 패트리샤 레지던스는 생각보다 역에서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피로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에서 10분 거리라 되어 있지만, 10분은 상당히 긴 거리였다. 패트리샤 레지던스는 호텔이 아니라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팬션에 가깝다. 짐을 풀고 테라스에 나가니 바로 거기에서 마테호른을 볼 수 있다.

어때?”

. 아주 나쁘지는 않네.”

그녀의 반응은 시원치 않지만 나는 여기가 쏙 마음에 든다. 짐을 내려놓고 “COOP”을 찾아 다시 길 위로 나선다. 쿱은 내가 앞으로 스위스 여행에서 가장 많이 드나들게 될 대형 슈퍼마켓이다. 스위스의 비싼 물가와 상관없이 여기에서는 값싼 가격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다고 가이드북에 써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그날 저녁 거리로 인스턴트 피자와 와인 한 병과 맥주 한 팩을 산다. 더불어 바나나, 포도와 같은 과일과 음료수, 생수 등도 쟁겨 놓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오븐을 키고 피자를 굽기 시작하고 그녀는 과일과 채소를 닦기 시작한다. 그렇게 스위스 만찬이 시작된다. 2층 테라스 테이블에 피자 한 판과 와인과 맥주를 펼쳐 놓고 우리는 저녁 9시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청청 저녁을 먹기 시작한다. 피자 한 입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의 인상은 동시에 찌그러든다.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피자는 짜고 별로였다. 청정 지역에 파는 인스턴트 식품이라고 예외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공기는 시원했고, 와인은 달달했고, 맥주는 시원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있다. 그녀가 피곤하다며 샤워하러 들어간 시간, 그 혼자된 시간에 난 오늘 두 번째 담배를 물었다. 마테호른을 마주하며 피는 담배 맛이 어떠냐고?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그런데 해는 도대체 언제 지는 걸까? 저녁 10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