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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저 마을에 언제쯤 도착할까? 리펠알프에서 체르마트로


얼마나 걸었을까? 이정표에 쓰여져 있던 예상 시간을 훌쩍 넘겨 우리는 리펠알프(Riffelalp)에 도착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리펠알프리조트에 도착했다. 리조트 앞 카페 바스코(Basco)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들이 보는 책은 왠지 세상과 두뼘쯤 떨어진 이야기일 듯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파란 하늘, 흰 설산을 향해 넓게 펼쳐진 노란 우산에 앉아 퐁듀를 시킨다. 부글부글 끓는 노란 치즈탕에 식빵을 데쳐 먹는 퐁듀는 예상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던 것처럼 짜기만 했다. 그래도 지나온 길을 떠올려보면 이 정도 짠 퐁듀야 참을만 했다. 너무 짜 표정이 일그러질 때면 맥주 한 잔으로 위안을 삼는다. 짠 치즈와 시원한 맥주가 들어가면서 그녀의 공포도 조금씩 무대 뒤로 퇴장한다.

1600년대 가난한 스위스 농가에서 길고 추운 겨울을 고립된 채 버텨야 했던 사람들이 신선한 식재료를 구할 수 없어 여름에 만들어 둔 치즈를 녹이고 굳은 빵을 적셔 먹던 데에서 유래한 퐁듀는 그렇게 2010년대 한 알프스 중턱 낭떠러지 앞에서 공포에 떨던 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었다.


 

 해발 2,222미터 리펠알프에서 체르마트로 가는 길은 앞서 고르너그라트에서 리펠알프로 가는 길과 많은 면에서 달랐다. 빙하, , 바위산, 협곡, 초원, 야생화, 마테호른, 구름, 절벽으로 구성된 길이 앞서의 길이라면 리펠알프에서부터 체르마트로 이어지는 길은 전나무가 길을 안내하고 소나무가 포근하게 감싸주는 길이다. 전자의 길이 남자의 길이라면 후자의 길은 여자의 길이다. 남자의 길이 놀라움과 숭고함 이면에 공포와 두려움을 깔고 있다면 여자의 길은 평화와 따뜻함 배면에 지루함과 무료함을 깔고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에 우리는 자주 멈추어 서면서 저 멀리 밑으로 넓게 깔린 체르마트 마을을 바라보곤 했다

북한산 같아, 여기는” 

길은 넓고 완만했고 그만큼 길고 길었으며 그 길 위에서 나는 자주 우리집 뒷산을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사실 이 길을 굳이 걸어 내려와야 할 이유는 돌이켜보니 없었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내려오기에는 이미 먼 길을 와 버린 상황이었다. 세상의 모든 길은 그렇게 걷고 나서야 무언가를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체르마트로 내려가는 길 위에는 앞서의 길에서보다 좀 더 많은 하이킹족들을 마주할 수 있었고, 우리는 자주 슁하니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가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거기 역시 알프스의 한 자락이었지만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푸르른 초원은 산행 6시간이 지나면서 그저 그런 풍경이 되어버렸다. 하물며 알프스의 상징이라 불리는 파란잎의 별모양 겐티아나 베르나 등 이런 저런 야생화들도 아 이쁘네하는 상투적인 감탄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제 정신을 차려 주변을 다시 꼼꼼하게 보기 시작한 것은 체르마트 마을에 거의 도착할 즈음이었다. 저 멀리 목조로 만든 가옥이 보이고 그 가옥의 창문에는 붉은 색의 화분이 촘촘하게 걸려 있었다. 창문뿐만이 아니었다. 정원 곳곳에 푸른 잔디와 함께 다양한 꽃들이 수를 놓고 있었다. 다섯 개의 별 펜타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풍접초, 사계절 붉은 꽃 사철베고니아, 어떤 환경에도 꿋꿋하게 잘 살아간다는 아프리카 봉선화, 추위에 강한 로즈메리, 추위에는 약하지만 고온과 가뭄에 강한 칸나, 지면 가까이 무리지어 피는 알리숨, 공기정화덩굴식물 에피프레넘 등등 수많은 꽃들이 피고지고, 그 과정의 모든 시간이 자연, 사람, 마을에 공존하고 있었다. 스위스 사람들은 참 꽃을 좋아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안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꽃도 아니고, 체르마트 가옥도 아니고,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집에서 구워먹은 삼겹살과 와인이었다. 우리는 테라스에서 삼겹살을 한 점 한 점 와인에 찍어 허기진 위 속에 집어 넣으며 서로를 다독였다. 우리는 이날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신들의 세계를 떠올리며 서로의 발걸음을 응원하며 9시간에 걸친 트레킹을 한 것이다.

"수고했네. 친구. 살아돌아온 것을 축하하며!"

이 저녁때만 하더라도 고생 끝이라 생각했다. 돌아보니 그 날은 프롤로그에 불과했던 것이다. 

체르마트가 부여한 공포와 두려움과 고생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