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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두려움과 놀라움 사이,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Bahn)



눈을 떴다. 새 소리가 들린다. 주변은 고요하다. 창문 밖으로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산야와 들판과 하늘이 자리하고 있다. 해는 언제 지고 언제 뜬 것일까? 인간이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해는 졌고 다시 떴다. 그렇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새소리와 함께 창문 밖에서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여행은 몸을 변화시킨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서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이다. 테라스로 나가 마테호른을 마주한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사이에 우뚝 솟아오른 대지의 여신은 굿모닝하며 씩씩하게 아침 인사를 건낸다. 오늘 우리는 이 친구에게 좀 더 가까이 갈 예정이다.


아침으로 치즈와 빵과 요플레를 먹는다. 마테호른을 마주한 테라스에서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몸과 마음과 자연이 하나로 일치하면서 평안함을 느낀다. 서울의 일상에서 자주 느끼지 못하는 조화성을 스위스의 한 시골 마을에서 느낀다. 뭔가 이게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 마음, 자연의 일체, 조용함과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의 조화. 이 일체성과 조화에 행복함을 느낀다.



바나나와 초콜릿과 몇 가지 먹을 것만 작은 가방에 챙기고 레지던스를 나온다. 아침 7시의 체르마트는 조용하다. 우리는 마테호른을 향해 조용히 걷기 시작한다. 체르마트라는 작은 동네는 길을 걷다, 사진을 찍다, 수다를 떨다가 고개를 살짝 들면 마테호른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언제 어디서든. 이곳에서의 모든 시간과 공간의 중앙에는 마테호른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늘 의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해발 3000미터 높이 이상의 영역에는 늘 우리를 바라보는 의 영역이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오늘 갈 곳은 그 신의 영역에 자리한 고르너그라트라는 전망대였다. 이 전망대는 마테호른을 가장 가까운데서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 주변에 펼쳐진 고르너그라트 빙하는 알프스에서 3번째로 긴 빙하로 알려져 있다. 전망대로 항하는 산악 열차가 출발하는 역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는 코스다. 오른편에는 짙은 녹음과 캠프장이 펼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마테호른이 보이고, 왼편에는 작은 하천이 흐른다. 도로를 따라 작은 스낵바와 술집이 드문드문 있지만 대부분 문이 닫혀 있다. 그 길을 따라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이 듬성듬성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걷고 있고, 산악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차림새와 국적, 그리고 생김새는 각양각색이지만 모두가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전망대로 향하는 역에 도착해 패스를 보여준 후 2장의 티켓을 구매한다. 역 앞에 도착하니 갑자기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90%는 일본 단체 여행객들이다. 가이드가 뭐라고 하면 이들 여행객은 잡담을 하다가도 갑자기 침묵하며 명상에 잠기는 모양새다. 자세히 보니 귀에 이어폰이 끼어져 있다. 아마도 가이드는 고르너그라트에 대해 설명하고, “몇 시에 기차가 출발하며 주의 사항 몇 가지를 일본어로 말하고 있는 거라고 추측한다. 아침 일찍 체르마트에서 일본 단체 여행객을 마주한 나는 뭔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니깐 너무 시끄러운 것이다. 체르마트라는 공간과 이른 아침이라는 시간, 그리고 단체 여행객의 수다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화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 맞어?”


그녀가 묻는다.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신의 영역으로 가는 플랫폼에서 마주한 단체 여행객의 수다가 물과 기름 같은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거다. 기차는 작은 협곡과 몇 개의 간이역을 지나면서 위로 위로 올라간다. 오른쪽으로 초원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 작아지는 체르마트 마을이 보이고, 초원 저편에는 마테호른이 자리하고 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이 단지 마테호른 하나만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숨어 있던 알프스의 고봉들이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것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찰칵찰칵 카메라 소리가 이어진다.





고르너그라트 역에 도착해 기차를 내리니 빙하와 설산,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굿모닝을 외친다. 해발 3,089미터에 위치한 역에서 마주한 마테호른은 이제 어깨를 같이 한다. 어디 그뿐인가? 마테호른 옆으로 몬테로자 산군과 리스캄, 브라이트호른 등 4000미터 명봉들이 보인다. 명봉과 명봉 사이에 자리한 구름의 띠를 보며 반야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떠올린다. 실스마리아(Sils Maria)는 스위스 남동쪽 알프스 지역의 조그만 마을이다. 호수와 설산, 그리고 설산과 설산 사이로 바다 같은 구름의 행진이 이어진다. 산의 정상에서 보면 구름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흐른다. 중년이 된 스타 배우 마리아와 비서 발렌틴은 이곳을 산행하며 연기 연습을 반복한다. 감독은 두 여성의 젊음과 성숙함, 현실과 대본 사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오가면서 실스마리아의 독특한 풍경을 이야기로 표현해낸다. 그리고 우리는 고르너그라트 주변을 걸으며 아침 공기의 상쾌함과 서늘함, 아침 햇살에 비친 흰 눈과 녹색 빛깔의 호수의 눈부심 속에 갈 길을 잃는다.





여길 내려가?”

그녀가 내리막길 앞에서 주저한다. 위로는 고르너그라트 빙하가 펼쳐져 있고 어디를 봐도 흰 눈이 뒤덮인 자갈길을 내려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역에 내린 사람들은 전망대 근처에서 연신 셔터를 누를 뿐 그 누구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자.”

나 역시 머뭇거리게 되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3000미터 고르너그라트 역에서 시작하는 트레킹 코스는 마테호른을 정면에 두고 수많은 3000미터급 봉들에 앉아있는 흰 눈과 파란 하늘, 갈색의 자갈 길과 새까만 까마귀와 함께 하는 길이다. 10여분을 단 둘이 내려가다 보니 저 뒤에서 산악자전거를 탄 일행이 쫒아온다. 그리고 일본 꼬맹이를 앞에 둔 3명의 남자들이 꼬맹이의 구령에 맞추어 내려온다.



산악자전가와 꼬맹이의 모습을 본 후 그녀도 나도 이게 트레킹 길임을 믿게 된다. 이정표보다 사람이 중요한 거다. 여기에서 길을 잃거나, 천길낭떠러지 절벽을 마주할 일은 없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자갈길을 내려가자 평지가 넓게 펼쳐진다. 시야는 넓게 트였고, 길은 굽이굽이 이어졌다. 어디에서 셔터를 누르든 몽롱하고 황홀한 풍경이 반복된다.




20분쯤 그 길을 내려가니 리펠제 호수(Riffelsee)가 눈에 보인다. 호수를 앞에 두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포토존을 마련해 사진을 찍고 호수에 비친 마테호른의 모습을 보려 애쓰는 모습이다. 스위스의 화가 아저씨는 아젤에 도화지를 끼운 채 그림을 그리고 있고, 일본 꼬맹이는 3명의 아빠를 호령하며 발 빠르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3000미터 산에서 뛰어다니는 5살배기 일본 아이의 자유스러움을 사진에 담겠다며 셔터를 눌러대지만 이 꼬맹이는 쉽게 정지 사진으로 재현되지 못한다. 쉴새 없이 뛰어다니고 함성을 지르고 뒤를 돌아보고 손짓으로 아빠들을 지휘하는 것이다. 인사를 건내 보지만 이 아이의 눈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


호수를 지나 끝도 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일본 아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갈래 길이 나왔다. 어디로 가야할까? 이정표를 보니 한 곳은 로우터부르덴을 거쳐 리펠알프로, 또 다른 한 곳은 리펠베르그(Riffelberg)를 거쳐 리펠알프로 가는 길이었다. 일본 꼬맹이는 망설임 없이 리벨버그로 가는 길을 택했고, 나는 그 아이가 가는 길이라면 우리도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같은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첫 번째 위기가 시작됐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가야할 곳을 분명하게 인도하고 있었지만, 그 길은 좁았고 길 옆으로 가파른 낭떠러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90도로 훅 떨어지는 천길 낭떠러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75도 이상의 기울기로 푸른 색 잔디는 2000미터 밑 체르마트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그 아득함 속에서 그녀는 눈물을 터뜨렸다.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고, 확실히 공포가 문제였다.

옆을 보지 말고 오직 길만 보고 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득 문득 마주하게 되는 오솔길 왼편의 광경은 아득하고 아찔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각도가 기울어지고, 그렇게 어느 순간 보니 천길 낭떠러지 고립무원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고, 가끔씩 이런 우리를 뒤로 한 채 산악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을 보는 우리도, 우리를 보는 그들도 서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마음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니 갑자기 아름다운 알프스 산은 두렵고 공포스런 공간으로 변신했다. 3000미터가 넘는 고봉은 웅장함을 넘어 아득했고, 1000미터 밑에 자리한 체르마트는 까마득하고 아찔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