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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스쿨/뉴스 놀이터

예멘 난민, 두려움이 올바름을 빼앗아가고 있어요~

출처: 한겨레신문



제주도가 예멘에서 온 난민들의 이야기로 시끄럽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섞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제주도 여행을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여성에 대해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우리 땅에 살게 할 수 있어요?”

내 아이들에게 위험한 나라를 전하고 싶은가요?”

멀리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입니다. 이 목소리에 대해 뭐라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능적인 두려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 외모, 문화, 종교 너무도 낯선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제 마음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다원성을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품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와 다른 낯선 것을 품어내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라는 작은 땅덩어리에서 그것도 분단된 작은 반도에서 지내온 우리의 시간 위에 다원성에 대한 경험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것도 마음의 장벽이 됩니다. 담대해지고 싶지만 겁이 먼저 나는 겁니다. 이 심리적 두려움을 넘어 어떻게 난민을 품어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던져진 중요한 숙제입니다.

이 숙제를 풀어내는데 언론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관련하여 우선 서울대 이준웅 선생님의 칼럼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준웅 선생님은 예맨 난민을 다루는 언론보도에 유감을 표합니다. 온통 혐오뿐이기 때문입니다. 난민 혐오, 이슬람 혐오, 무슬림 혐오, 예멘 혐오, 그리고 이 모두를 조합하고 확장한 것들에 대한 혐오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혐오에 대한 고발과 규탄이 넘치다보니 혐오에 대한 혐오가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 수준이지 뭐라는 식의 자기혐오도 보인다고 개탄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혐오담론으로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실제로 예맨 난민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무엇을 어째서 혐오하는지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에 대해 이준웅 선생님의 논리는 명징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갖춘 국가다. 법에 따라 난민 인정에 관한 신청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난민 신청자는 변호사의 조력은 물론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의 동석을 요구할 수 있다. 신청자는 또한 심사 결과에 이의를 신청할 수 있으며, 이의신청 결과에 대해서도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법무부 장관은 난민 신청자에게 유리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해서 활용할 의무가 있으며,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생계비와 의료 지원, 그리고 주거시설 지원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언론은 법으로 정한 바에 따라 예멘 난민의 난민 신청, 심사, 이의신청 및 행정심판 과정에 어려움이 없는지 살피면 될 일이다. 우리나라는 2013년 이미 난민 신청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업했다는 이유로 그를 구금하거나 추방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법적으로 판단했던 나라다. 당시 재판장은 판결에서 난민 신청자의 취업활동을 공공의 안전을 해쳤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또한 난민 신청자들이 심사와 이의신청을 거치면서 장기간 난민의 상태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특별히 언급했다. 난민 신청자의 취업활동을 제한하는 일은 보호를 방기하는 일이기에 그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부정의가 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예멘 난민을 계기로 삼아 이슬람 혐오, 무슬림 혐오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은 그것이 종교적 이유든, 경제적 이유든, 인종적 이유든 정의롭지 않은 것이지, 그 바르지 않음을 얄팍한 혐오라는 감정적 언어로 언론이 포장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멘 난민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하고 픈 말!

앞으로 제주도 여행을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여성에 대해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무슬림들을 어떻게 우리 땅에 살게 할 수 있어요? 내 아이들에게 위험한 나라를 전하고 싶은가요?”

내 마음 속에 울리 펴지는 이와 같은 언어들에게 일갈하고 싶은 말!

당신은 정의롭지 않아요. 당신의 두려움이 정의, 올바름을 빼앗아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