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스쿨/뉴스 놀이터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니깐. 악.플.


오늘은 댓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저는 인간이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공에 있어서는 선한 면이 부각되고, 어떤 인연에서는 악한 면이 부각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 아주 좋은 사람도 아주 나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호모사피엔스의 세계, 도시의 세계, 자본주의의 세계, 어른의 세계에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삶을 맡겨가다가는 점점 더 나쁜 기운이 강화될 것이라는 어떤 확신은 경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블라인드라는 어플을 아시나요?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익명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장인데요, 누군가 블라인드를 통해 사내 여론과 정보와 풍문을 파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깔아보았는데요. 며칠 만에 부랴부랴 삭제했습니다. 이유는 거기는 쓰레기장이었습니다. 저희 회사, 개인적인 착각일 수도 있지만 다른 조직에 비해 선한 면이 좀 더 많이 부각되는 조직이라 생각합니다. 경쟁이 과도하게 치열하지 않고, 선후배 관계가 여전히 살아 있고, 사회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그런 문화가 여전히 있는 조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블라인드, 여기는 무슨 일베 수준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간극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다 잠정적으로 네 가지 가정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공동체주의가 발전한 동네에서 익명성이 폭력적이고 타자에게 상처를 줄 메시지로 연결될 가능성은 자유주의가 발전한 동네보다 훨씬 더 높다.

둘째, 잠재적으로 이념 갈등이 많은 동네에서 익명성이 폭력적이고 갈등적인 메시지로 연결될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동네보다 훨씬 더 높다.

셋째, 익명성을 담보하는 토론 공간은 실명을 전제로 한 토론 공간보다 이드(id), 무의식, 원초성에 좀 더 가깝다.

넷째, 익명성이 담보되는 공간의 여론을 일반 여론으로 등가시할 때 엄청난 여론 왜곡이 일어난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일부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데 키보드 앞에서 익명으로 글을 쓰는 나는 사적세계, 공공세계에서 드러나는 의 모습과 비교할 때 찌질하고 못난 아웃라이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터넷 뉴스에 대한 댓글 역시 블라인드 어플에서 쓰여지는 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메시지가 공존합니다. 때론 따뜻하고 때론 논리적이며 때론 창의적인 글도 존재하지만, 이런 글들은 이상한 의견, 욕설, 음란성 광고, 조롱, 비난에 묻혀 이도저도 아니게 됩니다. 이 인터넷 댓글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피력하는 분들은 꽤 많은데요, 조금 오래됐지만 우선 전북대 강준만 선생님이 한겨레 21에 기고한 칼럼을 함께 읽어보죠. 제목은 댓글민주주의에 대한 착각입니다.


뉴스 1) 댓글민주주의에 대한 착각 (한겨레 21, 2008년 1월 31일)

 

강준만 선생님은 악플을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라고 전제합니다.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악플은 호모사피엔스적 현상이지만 한국이나 아시아권 등 공동체주의가 강한 집단에서 좀 더 문제가 크게 나타난다고 봅니다. 어쨌든 그가 악플을 한국적 현상이라 보는 이유는 한국의 유별난 마을 의식, 관계 문화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예의를 강조하고, 지연, 학연, 혈연 등등 연대의식을 강조는 문화. 관계는 자주 시련이죠. 눈치, 예의, 관계 맺기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요구됩니다. 오프라인에서 나타나는 이런 특성이 온라인으로 오면 정반대의 특성과 행동으로 발현되게 되는데요, 악플이라는 행위가 오프라인 현실의 결핍에 대한 분풀이 또는 보상심리의 산물로 자리를 잡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강국, 한국은 이 악플에 지금껏 너무도 너그러웠습니다. 왜 그럴까요? 변화의 국면에서 댓글이 특정 여론의 움직임을 읽게 하는 지표 구실을 한다는 착각, 이를 규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변화된 시대를 부정하는 꼰대로 읽히고, 표현의 자유에 반대하는 것처럼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국정원 댓글 조작, 드루킹 사건 등등은 댓글에 대한 이 너그러움이 만들어 낸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여기야 말로 표현의 자유, 댓글 민주주의라는 고상하고 추상적 언어에 숨어 쓰레기 정글이 된 것이죠. 여기에 수많은 정치적 욕망이 버무려지면서...

 

블라인드 어플에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저는 개인적으로 뉴스 댓글을 읽지 않습니다. 이게 정신적 피로도를 높이기 때문이죠. 많은 전문가들 역시 악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둔감하고 외면하는 것이라조언하며 피해를 당하면 극히 일부 미성숙한 아이나 열등한 성인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제언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다보면 나의 정치적 표현에 대한 검열을 스스로 강하게 하기 마련이고, 공적 글쓰기에 대한 주저함도 가지게 되는데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장하는 인터넷 익명성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꼴이라고 할까요?

 

이에 대해 강준만 선생님의 이야기는 귀를 기울여볼만합니다.

 

“(온라인에 대한) 자유주의적 착각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던 과거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다. 악플의 폐해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그걸 통제하는 것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 얻을 게 더 많다는 논리다. 권력감시, 내부고발, 창의력 발휘 등의 장점이 열거된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이게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식이다.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사회적 비용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거론된다 해도 분열과 혼란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원론이 답으로 준비돼 있다. 내가 궁금한 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을 제대로 만들고, 모든 공적 영역을 투명하게 만드는 법과 규칙을 완비하는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는 가운데, 왜 그런 기능을 인터넷으로 대체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 인터넷을 그런 노력에 이용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터넷을 강력하게 통제하자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표현의 자유 어쩌구 저쩌구 거대 담론 걷어치우고 구체적인 룰을 만들자는 겁니다. 저는 댓글에 있어 익명성보다 자기 이름에 책임지는 문화의 정착이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익명성의 보호막에 안주하는 게 주는 편안함보다 폐혜가 훨씬 큰 것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다음 편에서는 댓글부대의 계보와 댓글전쟁을 쓴 장강명 소설가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