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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언덕 위의 도시, 베른의 어느 여름날 풍경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과 함께 베른에 내린다. 그들은 인터라켄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가만히 주변을 관찰한다. 베른. 한 국가의 수도답게 기차역은 수많은 플랫폼과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우선 코인라커를 찾아 트렁크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역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었고, 사람은 많지만 마땅히 물어볼 사람은 찾지 못한다. 기차역을 빠져 나오는 한 켠에 핫도그를 파는 매대가 서 있고, 거기에는 왠지 찰리라 불릴 것 같은 그런 친구가 서 있다.

“Excuse me, Do you know where coin locker is?”

왠지 이렇게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정확히 발음한 것은 코인라커 정도였고, 내가 바디랭귀지로 그가 봐주기를 원했던 것은 내 뒤편에 그림자처럼 따라 오고 있는 무거운 트렁크였다.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대략 이렇게 말했다.

.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여기서 좀 걸어가야 하거든. 우선 계단 밑으로 내려가서 쭉 앞으로 200미터 정도가. 그러면 베른 역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 그 문으로 들어가서 우회전해. 거기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을 거야. 그걸 타고 1층 아래로 내려가. 그 다음에 왼쪽으로 돌아 20미터 정도 가고, 거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30미터 정도 가고...”


나는 어디에선가부터 그의 이야기를 놓쳤고, 그냥 제일 처음 이야기한 것만 기억하기로 한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그의 말대로 계단 밑으로 내려가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역 내부로 들어가니 이해할 수 없는 알파벳의 조합과 함께 그림들이 옆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왜 문자가 상형문자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만 찾으면 굳이 누구에게 “excuse me”를 연발하지 않아도 된다. 역 내부로 들어가니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수많은 상점들을 스쳐 지나면서 계속해서 열쇠 모양의 코인라커 그림을 따라간다.


코인라커를 찾아 트렁크를 집어 넣고 역을 빠져 나오니 아직도 아침 930. 아침 햇살이 눈부셔 선글라스를 낄 수밖에 없는 날씨다. 시차 적응이 안된 탓인지 몽롱함을 느낀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지도 하나를 얻고 가이드북에 나온 투어 코스를 참고해 올드 타운으로 들어간다.





스위스 베른의 올드 타운, 그러니깐 구시가지는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유네스코에서 밝히 세계문화유산 등재사유는 이렇다고 한다. “아레 강에 둘러싸인 12세기에 조성된 언덕 위의 도시. 몇 세기에 걸쳐 독특한 컨셉으로 도시가 발달했으며 15세기풍의 아케이드, 16세기풍의 분수들을 담아내고 있다.” 베른은 길과 사람이 가깝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구시가지의 중세 건물들은 다닥다닥 어깨를 붙이고 있고 창문에는 빨간색, 분홍색 꽃을 피운 제라늄 화분들이 정렬되어 있다. 건물 1층은 원형 아케이드가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붙어있다. 아케이드 아래 자리한 반 지하에는 레스토랑과 옷가게들이 즐비하다. 아마 중세 시대에는 와인의 저장고로 쓰였던 곳이라고 추측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돌길이 펼쳐져 있고, 그 길 위에 자전거와 사람과 트램과 버스가 공존한다. 얼핏보면 무질서한 풍경이지만 중세 시대 느낌의 거리 위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과감하게 파란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선명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 붓의 흐름에 따라 칠해져 있고, 그 밑으로 진한 녹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숲과 녹색 물감에 아이스를 얹어 만들어 놓은 듯한 아레강의 빛깔과 빨간 지붕들이 찬란한 색의 잔치를 펼쳐간다.



그것은 아름다운 주말 아침 풍경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풍경 위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조깅을 하고 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베른역 바로 앞에 자리한 국회의사당 한 켠 돌 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본다. 조용함 속에서 아주 작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저 멀리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 나뭇잎 소리. 작은 소리들이 귓속으로 들어 올려지고 나는 그 소리에서 일상과 다른 느낌을 맛본다.


국회의사당을 뒤로하고 우리는 아레 강이 흐르는 아랫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아레강은 베른마을을 U자형으로 감싸고 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 후 우리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 강 바로 옆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조용하고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흐른다. 양지 한쪽에 강아지가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잠들어 있기도 하고, 강물이 모여 활처럼 굽게 되는 여울목에는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고, 강 건너편으로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과 그 위로 우뚝 솟아 있는 성탑과 빨간 지붕들이 눈에 띈다. 아레 강의 색깔은 빛의 대가인 누군가의 작품에 나올법한 색의 잔치이고 나는 그 강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이곳에 오랜 시간 머물러도 지루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나는 강가의 한 벤치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그 사이 한 마리의 개가 우리 주변에 먹을 것이 없는지를 탐색하려 왔다 사라졌고,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스위스에 왔고, 베른에서 이틀을 머물 것이며 내일 체르마트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한 한국인 청년을 만났다.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 길을 걸었다. 잔디 위에서 하키를 하는 여고생들과 이들을 응원하는 가족들을 지나고, 개와 함께 조깅을 하는 아가씨를 지나고, 다리 밑단에서 일광욕을 하는 집시 아저씨를 지나 다시 올드타운에 들어서자 돌길 위에는 벼룩시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협동조합 체제로 운영되는 벼룩시장은 물건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과 팔고자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대부분은 베른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야채와 치즈, 베이커리, 수공예품이 작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고 나와 그녀는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구경한다.

우리도 치즈하고 빵 좀 사갈까?”

누가 먼저라할 것 없이 우리는 아침에 조식으로 먹은 맛있는 치즈를 떠올렸고, 벼룩시장에서 파는 치즈야말로 스위스 치즈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스위스 사람처럼 생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줄서있는 매대 앞에 선다.

뭘 줄까?”

살아가면서 스위스 농장 한 켠에서 소를 몇 마리 잡았을 법한 느낌의 우락부락한 스위스 아저씨가 웃으며 묻는다.

. 사실 우리 스위스 베이커리 잘 몰라. 여행객인데 네가 추천하는 스위스 베이커리를 트라이해보고 싶어. 너무 많이는 말고 하루 이틀 먹을양만큼.”

그는 조금 망설이다 한 개의 빵을 추천한다.

하나는 좀 적고, 하나 더 추천해줘. 대신 양은 적당히. 우리 배낭이 크지 않아.”

그는 문제없다는 표정으로 한 개의 베이커리를 더 자른다.

고마워.”

백정 아저씨를 지나 좀 더 가보니 이번에는 치즈를 파는 젊은 언니들을 만난다. 이야기의 체계는 비슷하다. “, 너희 치즈 무지 맛있나보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줄을 서 있어. 우리 여행객인데 우리한테도 2개만 추천해줄래?”

20대 초반, 내가 볼 때 치즈를 먹으며 기타를 칠 것 같은 언니가 이것 저것을 트라이해보라며 잘라 준다. 언어가 부족한 우리는 굿, 굿을 외친다. 그런데 정말 맛있는 거다. 그녀가 더 욕심을 내어 시선에 꽂힌 검은 치즈가 어떠냐고 묻는다. 갑자기 기타리스트 언니의 표정이 애매해진다.

, 그게 말이야. 염소 똥을 3년 동안 숙성시켜 만든 치즈인데 괜찮겠어? 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이것은 정말 치즈 매니아들만 찾는 거거든.”

우리는 됐다라는 표정을 짓고 그녀가 추천한 치즈를 종이봉투에 넣어 나온다. 우리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스위스 할머니 한 분이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말한다. “저도 이 치즈 좋아하는데, 탁월한 선택이었어. 여행 잘 하구!”

왠지 나와 그녀는 기분이 좋아진다. 친절한 사람들, 그들과 어설프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응원 받은 느낌, 뭔가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베른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나쁘지 않은 거다. 치즈와 베이커리를 조금씩 베어 물면서 우리는 길을 걸었다. 햇살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더 강해진다. 우리는 아케이드 한 켠에 자리한 카페의 바깥 의자에서 생맥주를 주문한다. 그리고 햇볕을 쬐면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과 옆을 스쳐가는 트램을 바라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의 스타일, 옷차림, 표정에 대해 나름 뒷담화를 나누면서 그 시간을 즐긴다.



올드타운을 나와 장미공원으로 가는 길은 뉘데크교를 건너고 오르막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괴테는 베른을 구경한 후 대문호답지 않은 문구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런 말이었다. “내가 보았던 도시 중에 가장 아름답다.” 이런 상투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장미공원으로 가는 오르막길, 그러면서 점점 부감으로 넓은 시야로 펼쳐지게 되는 베른을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된다. 아레강에 안긴 듯한 베른의 풍광은 기막히게 멋지다.



우리는 장미공원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벤치에서 바람을 맞고, 태양을 마주하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빛이 강해 아무리 셔텨를 눌러도 그 느낌을 재현할 수 없는 그런 오후, 그곳에는 수백 종의 장미와 주말 가족 나들이를 온 사람들과 멍하니 담벽을 바라보는 고양이와 빨간 지붕과 파란 강물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멋진 오후의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베른대성당에 들린다. 사실 나는 유럽의 오래된 성당에서 어떤 감흥을 느낀 경우가 많지 않다. 이것은 나의 감수성의 문제일 수도 있고, 교회 중심으로 발전한 서구 중세 문명에 대한 묘한 반발감, 아니 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른대성당에서 나는 묘한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종소리, 오르간소리, 수백 년의 온도와 습기,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 성당 안과 밖이 분리되면서 나는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몸 안으로 신이 들어온 듯한 경건함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에르하르트 킹이 그린 최후의 심판이 장식되어 있다. 두려운 표정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234명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내부에는 15세기에 제작된 높이 12미터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이 시선을 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예수님의 부활 등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사이로 세상의 빛이 들어온다. 마치 성당 내부와 외부, 종교와 현세, 이승과 저승, 천당과 지옥을 관통하는 매개물이 스테인드글라스인 듯싶다. 나는 성당 내부의 한 의자에서, 그리고 예수와 마리아상의 조각 앞에서 한참을 있었다. 의자에서는 오르간 소리를 들었고, 예수와 마리아상에서는 죽음을 떠올렸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손과 다리에는 구멍이 파져 있고 그는 표정 없이 누워있다. 그리고 그 옆의 마리아,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본다. 하나님, 하나님, 제 아들을 어찌하려 하십니까? 그 표정 속에서 나는 검은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의 마음을 보게된다.


베른 구시가지에는 아이슈타인 박물관, 시계탑, 분수대 등 작은 공간에 볼 거리가 즐비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베른을 첫 번째 정착지로 삼은 이유는 아인슈타인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 후 아인슈타인이 직장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 그의 절친 베쏘는 그를 베른의 특허국에 취직시켜준다. 이후 그는 경제적,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으면서 연구에 매진했고, 훗날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는 결정적 단서를 포착한 곳 역시 베른이다. 그는 거기에서 올림피아 아카데미를 운영했고, 거기에서 학문적 동지들을 만나 철학과 과학의 지평을 넓혀간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는 기계의 특허를 심의하던 청년은 열차 역들의 시간이 맞지 않아 짜증을 내던 당시의 일상을 발판으로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라는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낸다. 그는 거기에서 물리학의 주류에서 비껴 있었으며, 대학 임용에 실패하고 있었으며(게다가 박사 학위 취득 후 2년 넘게 백수 생활을 지낸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스스로가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하던 시절을 보낸다. 그 거리에서 마주한 사람들, 풍경들, 이야기들은 그의 학문적 지평의 토대가 되고 우리가 기억하는 아인슈타인을 탄생시키는 고향이 된다. 우리가 겨우 찾은 아이슈타인 하우스는 다닥다닥 어깨를 붙이고 서있는 중세 건물 중 하나였고 그 자체로 어떤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그 건물과 그곳을 둘러싼 건물 사이에 자리한 아기자기한 분수대와 그 분수대를 오가는 트램들과 그 트램들의 시간을 정하는 시계탑의 풍경 속에서, 그리고 예쁘고 고즈넉한 중세 건물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아인슈타인이 이 공간에서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누군가와 토론을 할 때 특허국에서 특허를 심사하고 있을 때, 방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논문을 볼 때 자주 그의 집 앞에 있는 시계탑은 자주 종을 울렸을 테다. 12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매 시각 정각 4분전이 되면 시계탑은 종을 울리고 시계탑 위에 새겨진 광대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시간의 반복됨 속에서, 그리고 정확성이 중요한 트램과 버스와 시계의 풍경 위에서 그는 지속적으로 시간을 고민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시계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광대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시간을 중심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렸다 흩어지는 광경이 펼쳐진다. 시계탑 주변에 춤을 추는 사람이 있고, 트램이 다니고, 많은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는다. 우리는 베른 도시의 출발 지점 시계탑을 마지막으로 베른에서의 일정을 마친다. 아직도 오후 4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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