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오후 회사 체육대회가 있었고 저녁에는 오랜만에 대학원 시절 함께 공부했던 선후배들과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토요일에는 이제 보청기가 없으면 잘 듣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뵙고 왔고, 오늘은 교회에서 평소 따르던 형님, 누님들과 특송을 부르고 책읽기 모임을 하며 수다를 떨다 왔습니다. 며칠 전 상가 집에서 만난 한 누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이제는 우리가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요즘 여기저기서 듣는 이야기면서 스스로도 자주하는 질문입니다. 누군가와 섞인다는 것이 시련이고 아픔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하지 않는 삶을 상상해보면 참 쓸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정과 연대, 그리고 공동체.
요즘 자주 생각하는 단어들입니다. 노희경 작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마 이 단어들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들이 그의 작품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 종영한 <나의 아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아저씨>도 언젠가 꼭 정리해고픈 텍스트인데, 제가 <나의 아저씨>를 좋아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정희네 술집” 때문입니다. 이 술집은 일상에 허덕이든 친구들이 모여 잠깐이라도 웃고 응원하고 울고 하는 우애의 플랫폼입니다.
각설하고 다시 노희경 작가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노희경 작가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사랑을 넘어 우정과 연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디어마이프렌즈>이기도 합니다. <디마프>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정과 연대의 대서사시입니다. 이 서사가 없다면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들, 아픔, 시련, 상처, 고통, 죽음을 관통해가는 과정이 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령 <디마프>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외로움과 무력감에 빠진데다 설상가상 치매진단까지 받게 된 희자를 구하는 것은 절친 정아였습니다. 혼자 남은 집에서 희자는 한밤 중 잠에서 깨면 정아에게 전화를 겁니다. 정아는 졸음을 참아가며 희자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그냥 묵묵하게...
희자 : 잘 땐 전화 꺼. 내가 귀찮게 하잖아.
정아 : 니 전화 받을라고 안 끄는 거야.
희자 : 내...전화?
정아 : 늙은이 하룻밤이 무서운데... 뭔 일 있음 어째. 내가 너랑 안 산다고 해서 서운했어? 근데, 희자야.
나는... 그냥 혼자 있고 싶어. 사방이 시끄러워서. 우린 같이 안 살아도 자주 보고 놀고...
힘들면 또 같이 있고 그럼 되니까. 굳이 같이 안 살아도...
희자 : 같이 안 살아도 너랑 나랑 있지. 언제나 지금처럼.
정아 : 그럼 있지. 늘 지금처럼...
희자 : 이제 자.
정아 : 화 풀렸어?
희자 : 넌 이중인격자 아냐. 석균 씨한텐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응원할게.
희자 또한 정아가 남편 석균과의 갈등으로 한밤중 차를 몰고 집을 나섰을 때 기꺼이 옆자리에 동승해 위로를 건네고, 요양원에 있는 친정엄마를 자신의 친엄마처럼 살뜰히 보살핍니다. 둘이 밤에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내 자수를 하러 가는 길에도 희자는 정아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며 자기가 했다고 하라고 합니다.
희자 (정아에게 머플러를 해주며) 너 해. 그리고 경찰서 가면 내가 했다 그러는 거다. 나는 암것도 걸릴 게 없잖아. 남편도 없고.
치매증세가 있는 희자가 걱정돼 수시로 희자의 집을 드나들며 집안일도 거들고 말벗을 해주던 정아는 어느 날 희자의 아들 민호와 함께 집에 갔다가 희자가 옷에 소변을 저리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정아는 아들 민호가 옷을 갈아입히겠다고 하자 희자가 마음 상할 것을 염려해 아들도 남자라며 밖에 나가 밥을 먹고 오라고 내보낸 뒤 자신이 옷을 갈아입히고 거실 바닥에 떨어진 소변을 걸레로 훔칩니다.
주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간 희자. 한밤중 잠이 안 온다며 정아에게 전화를 하자 한걸음에 달려옵니다.정아는 희자와 부둥켜안고, 이들은 평소 꿈꾸던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한 장면처럼 밤새 국도를 달리며 이렇게 외칩니다.
희자 : 야, 나 조희자야. 내 친구는 문정아야. 우리는 간다
어느 날, 희자와 정아, 그리고 난희와 완이는 요양원에 있는 정아의 친정엄마를 모시고 바닷가를 찾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휠체어에 앉은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 모두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황망한 정아 대신 장례를 준비하고 새가 되고 싶다던 어머니의 꿈처럼 바다에 분골을 뿌려드립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엄마와 그 친구들들을 지켜본 30대 후반 완(고현정)의 내레이션은 노인여성들의 연륜과 지혜에 대한 찬사에 가깝습니다.
완 (Nar). 경험 없는 내 자신이 조개껍질처럼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고, 온갖 세상일을 겪은 늙은 어른들이 거대하고 대단해 보일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모든 것을 순리라고 받아들일 때 나는, 어른들이 산
처럼 거대하고 위대하고 대단해 보인다.
극중 화자로 등장하는 30대의 완은 엄마의 친구들을 모두 이모라 부르며, 그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은 달려가 해결사 역할을 도맡아 합니다. 그러나 해결사 역할만 하는 건 아닙니다. 이모들은 그녀의 멘토이자 선배이기도 한 거죠. 가령 완희가 엄마 난희에게 장애인이 된 연하(조인성 분)와의 관계를 털어놓지 못하고 마음아파 하자 이하소연을 들어주며 친구이자 멘토 역할을 하는 건 이모들입니다. 정아의 딸 순영이 남편에게 맞고 응급실에 실려가자 한달음에 달려가 진단서를 끊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역시 이모들입니다.
<디어마이프렌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주이지만, 우정과 연대에 남성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남성 출연자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이성재(주현, 72세)입니다. 전직 변호사. 희자와 정아와 동창입니다. 젊어서는 일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여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쓰러지면서 알았습니다. 일도 친구도 여자들도 모두 아내보다 우선일 순 없구나. 그래선 안됐었구나. 그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병상의 아내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고, 그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지난날 못한 게 후회되지만 그는 후회없이 앞으로는 하루라도 더 재밌게 살려합니다. 그리고 문득, 아내가 성당을 가란 말이 생각나서 성당을 나간 지 석 달 즈음, 거기서 코흘리개 첫사랑 희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여자 자기를 못 알아봅니다. 오히려 찝쩍대지 말라고 합니다. ‘나, 성재야’ 희자가 그제야 알아보고, ‘뭐야, 너 살이 디룩디룩… 그리고 성재면 뭐?’ 하고 돌아섭니다. 희자 덕분에 다른 동문들과도 연락이 되어 그는 한껏 사는 게 더 재밌습니다. 그리고 정말 희자가 좋습니다. 둘은 그렇게 아웅다웅 새롭게 친구가 됩니다. 성재는 희자의 치매증세가 심해지자 희자의 집에 설치된 CCTV를 자신의 아이패드와 연결해 시시각각 희자의 안위를 살피면서도 희자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도움을 줍니다. 또한 성재는 희자가 자식들 때문에 자신과의 관계를 불편해 한다는 것을 알고, 희자의 옆에 친구로 남기로 합니다.
성재 : 내가 너랑 살재냐 놀재지. 내가 너랑 연애하재냐 친구하재지.
남편과 사별하고 치매까지 얻어 우울한 희자를 위해 성재는 젊은 시절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시골마을로 여행을 가고 희자가 살아온 날들을 들어주며 위로합니다. 다음날 해돋이를 보기 위해 산에 오른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습니다.
희자 : 나 이런 데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성재 : 나는 지금껏 니가 살아줘서 참 고맙다.
완의 남자친구 서연하 역시 인상적인 캐릭터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간 완이 3년째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지만 그녀에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섭섭하기도 하지만 완이와 영상채팅을 하며 친구처럼 관계를 유지하며 완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연하 : (사고가 났던 성당 보여주며) 종소리 듣고 있어? 여기 오는 게 나도 편하진 않았지만, 용기를 냈지. 우리의 영원한 우정을 꼭 빌고 싶었거든. 완아, 난 영원히 널 사랑해, 친구로서. 외로워하지 마. 너한텐 내가 있다
연하는 완의 엄마 난희가 수술을 받는 날, 불편한 다리를 이끌로 멀리 슬로베니아에서 날아와 슬픔에 빠진 완을 위로합니다. <디마프>에 출연한 남자의 우정은 따뜻하고 깊습니다. 별로 현실감이 없다구요? 끄떡끄덕. 노희경의 드라마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건과 갈등은 현실적이고, 그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은 이상적입니다. 우정과 연대의 대서사시. 이것이 노희경 세계의 이상적 기운인 거죠. 이건 남녀의 문제, 동세대의 문제뿐만 아니라 엄마와 딸의 문제, 다른 세대간 소통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연하의 엄마 난희는 간암 수술을 받은 자신을 간병하겠다며 연하에게 가는 걸 망설이는 완에게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며, 장애가 있는 남자를 선택하는 딸의 결정을 응원해 주기로 합니다.
난희 : 니가 니 인생 안 살고 나만 보고 있으니까 내가 딸년 등골 파먹는 진짜 등신 같잖아. 암 걸린 것도 성질나는데, 등신은 그렇잖아. 엄마가 너한테 집착이 많아서, 아주 가란 소린 못해. 이번엔 일주일만 가. 그러다 엄마 몸이 더 나아지면 그 달엔 한 달, 그러다 결혼해 아주 가고...
결국 완은 슬로베니아와 한국을 오가며 다시 행복을 찾게 되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여성들의 가족을 넘어선 우애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삶의 고비 고비를 넘어온 노인여성들은 죽어도 길 위에서 죽고 싶다는 정아의 바람처럼 시간이 날때마다 캠핑카를 끌고 젊은 청춘처럼 길을 나섭니다. 이 드라마의 엔딩씬은 바닷가에 간 이들 일행이 팔짱을 낀 채 나란히 앉아 평온하게 노을을 지켜보는 모습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완의 내레이션은 드라마 <디마프>가우리에게 던져주는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완: (Nar)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왜 나는 지금껏 그들이 끝없이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지난날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어차피 첨에 왔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 길도 초라하지 않게 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너무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고 있는데... 다만 소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좀 더 오래가길,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게, 조금 더 오래가길.
"조금 더 오래가길" 이 말이 전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너무너무 현실적이어서. 이 엔딩에 대해 노희경은 자신의 SNS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예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 나도 누구도 결국은 부모들이 걸어간 그 길 위에 놓여있단 거다. 전혀 다른 길 위에 놓인 게 아니라 드라마를 함께한 친애하는 나의 늙은 동료 배우 선배님들, 완이(고현정)를 내세워 내뱉은 살벌한 작가의 꼰대 뒷담화에 맘도 아리셨을 건데, 너그러이 괜찮다 받아주신 것, 눈물 나게 감사한 마음이다. 더러는 아파서, 불편해서, 이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시청자도 있는데, 당신들은 당신들의 불편한 얘기를 온 몸으로 마주하고 서서 표현하면서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우셨을까, 마음이 먹먹하다. 그리고 배운다. 나도 당신들처럼 어떤 미래가 닥쳐도 내 앞에 주어진 길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고 치열하게 걸어가리라. 도망치지 않으리라. 웃음도 잃지 않으리라.”
지난 3일 동안 많은 어른들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디어마이프렌즈를 떠올리며 같은 생각을 합니다.
나도 당당하고 치열하게 걸어가리라. 도망치지 않으리라. 웃음도 읺지 않으리라. 내 앞에 주어진 나이듦과 노년과 아픔과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참고문헌
김미라(2017). TV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여성주의적 서사. <한국극예술연구>, 56호, 27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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