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작품 중 최고가 무얼까 돌아보면 개인적으로는 <디어 마이 프렌즈>입니다. 여성 노인들이 중심이 된 이야기입니다. 삼십대 후반의 번역가인 박완(고현정)이 내레이터가 되어 엄마와 그 친구들 이야기를 중개하는 구성입니다. 이야기는 치매를 앓는 희자가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녀의 병이 깊어지는 과정을 따라 전개됩니다. 2회에 걸쳐 <디어 마이 프렌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볼까 합니다.
우선 희자.
소녀같이 가녀리고 조신한 60대 여성입니다. 남편이 죽고 나서 갑자기 사는 게 두려워집니다. 모두가 제 자신을 쓸모 없고, 우중충하며 불쌍한 과부 노친네로만 보는 것 같아 주눅이 듭니다. 돌아보면 그녀의 삶은 무난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옵니다. 남편이 죽고, 자식들의 짐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처치 곤란한 공주 엄마가 된 그녀는 고성이 오간 가족회의 끝에 장남의 집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한 평생 고상하고 수동적으로 살아온 그녀는 장남에 끌려 필리핀으로 갑니다. 거기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짐을 싸 남편을 떠나보낸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자립을 시도합니다.
홀로 남은 집.
이 집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남편의 외도. 남편은 죄책감의 표현인 양 바람을 피지 않겠다며 벽장 속에 들어갔고 그 속에서 외롭게 죽어갑니다. 남편이 벽장 속에서 죽은 집에 홀로 남은 희자의 삶은 불안과 두려움을 오갑니다. 자살시도를 하려다 경찰서까지 가는 해프닝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무력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며 마음을 다잡고 성당에 나가 자원봉사를 하는 등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던 중 치매 진단을 받게 됩니다.
희자 : 엄마, 치료받을 거야. 그러니까 너, 낼 가.
아들 민호 : 나 여기서 살라고
희자 : (화난 표정으로) 싫어, 니가 왜 나랑 살어. 넌 결혼도 했는데.. 마누라랑 살아야지... 전에 의사가 그랬어. 망상 장애래. 치매 아니고, 약 먹음 괜찮어.
민호 : 맞아. 그러니까 엄마, 약 잘 먹자.
희자 : 알어. 약 안 먹음 치매 걸려. 내가 약을 좀 걸러 먹어 그래. 그러니까 난 병원 가고, 넌 집에 가고, 우린 지금처럼 따로 살어.
이후 치매증세가 심해져 실종됐다 집으로 돌아온 희자는 가족들과 주 변사람들의 관심과 돌봄을 부담스러워하며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치매요양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합니다. 후배인 충남에게 치매요양원에 같이 가보자던 희자는 요양원을 둘러본 후 집에 가자는 충남에게 가지 않겠다며 끝내 혼자 남기로 합니다.
희자 : 민호, 하늘이(며느리) 다 고생이야, 나랑 있음. 애기랑 지들끼리만 잘 살게 냅두고 싶어. 충남아, 언니 여기 냅둬... 평생 남 피해 안주고 지금껏 살았는데, 언니 도도하게 여기 있다가...
이건 우리 어머님들의 마음 아닐까요? 이 대사가 너무 마음 아픕니다.
다음은 희자의 평생 절친 정아(72세, 나문희 분).
그녀는 젊은 시절 가난과 모진 시집살이, 유산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세 딸의 엄마로 충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남편 석균은 매사에 그녀를 무시하고 가장의 권위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인물입니다. 정아는 신혼 때 남편이 약속했던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품고 무던히 참고 견딥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양원에 있던 친정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입양해 키운 큰딸 순영이 오랫동안 교수인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아는 큰딸을 보면서 자기의 젊은 시절을 떠올립니다. 큰딸의 이혼을 적극 지지하며 남편 몰래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팔아 딸의 미국행을 돕습니다. 자신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참고 살았지만, 딸에게는 이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걸 응원하는 겁니다. 집을 나와 임시로 고시원에 머무는 순영을 찾아가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정아 모녀가 나누는 대화는 인상적입니다.
(정아의 딸) 순영: 엄마. 나는 이혼한 게 아니라 해방된 거야, 해방
정아 : 해방이네. 자유네 자유! 니 말이 맞네.
그렇게 딸을 떠나보내고 거의 같은 시간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정아는 자신 역시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편 석균이 여행 티켓과 수천만 원이 든 통장을 가지고 와 달래지만 정아는 자신의 삶을 살아보겠다며 이를 뿌리칩니다.
“죽어도 길 위에서 죽을 거야” 칠십대 정아의 외침이 인상적입니다.
정아 : (여행을 가자는 친구들에게) 기분 전환이 아니라 인생 전환할 거야... 엄마처럼 죽어 새 되면 뭐해. 살아 자유로운 새 돼야지. 엄마 가실 때 맘먹은 거야.
다음은 희자와 정아의 초등학교 후배 장난희(63세, 고두심 분).
시장에서 대박 짬뽕집을 운영하며 늙은 친정부모와 장애를 가진 남동생, 그리고 딸 완희를 살뜰하게 챙기며 살아갑니다. 남편이 10년 전 자동차 사고로 죽으며 일만 하는 그녀에게 즐기며 살란 말을 유언처럼 남깁니다. 실제로 그녀는 즐기며 산다가 삶의 모토입니다. 하나 있는 딸년이 시집을 못 가고 있지만, 요즘 노처녀가 흉 되는 세상은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재미있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던 인생에 문제가 생깁니다. 한때는 절친이었던 영원이, 그러나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영원이, 뉴욕으로 이민 간 그녀가 돌아온 겁니다. 30년 전 난희는 남편이 안방에서 제 초등학교 동창과 맨몸으로 뒹굴고 있는 걸 목격합니다. 침대에서 뒹굴던 그년은 영원이의 절친이었습니다. 영원이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나한테 숨길 수 있었을까? 친구여서 말 못했다하지만, 친구니깐 말해줘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그 길로 영원이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동문회에서 다시 영원이를 만나게 된 겁니다. 지난 날 일을 다 잊은 양 웃는 영원이의 모습이 꼴도 보기 싫습니다. 설상가상. 반찬을 주러 딸년 완이의 오피스텔에 갔는데 유부남 회사대표와 내 딸년의 분위기가 요상합니다. 삶을 즐기고 싶지만, 관계는 자주 시련이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간암 진단을 받습니다.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도 난희는 자신의 부재로 인한 가족들의 앞날을 걱정합니다. 왜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우는 딸 완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난희 : 내가 너한테 말하면, 할머니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져? 평생 내 짐인데...(중략) 수술 날짜 받아놓고 이 지경이 돼서도, 나 없음 너 어떻게 살까?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은... 그 걱정으로 머리가 한 짐이야, 내가!
다음은 난희를 불편하게 하는 영원(63세, 박원숙)의 이야기.
영원은 어릴 적 난희의 절친이었습니다. 시원시원하고 유머있고 속 깊고 정 많은 젊음이었습니다. 열아홉에 길거리에서 캐스팅 돼 배우로 광고모델로 승승장구합니다. 유부남 선배를 사랑하게 됩니다. 독실한 크리스챤이라 처음엔 마다했습니다. 선배에게 이혼하고 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끝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선배가 부인과의 이혼서류를 보낸 겁니다. 그러며 미국으로 떠나자 했습니다. 야반도주하듯 선배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는데, 한 달도 안돼서 선배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합니다. 이유인즉, 아내가 약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 그래? 가봐야지…
그녀는 그를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첫 남자와 한 달 못 살고 이혼하고 15년이 지나서야 남자를 만났는데, 열 살 어린 연하남이었습니다. 5년 정도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연하남이 사업에 실패해 부도를 맞습니다. 그러며 이혼하자고 합니다. 참 버라이어티한 인생이다 싶었습니다.
전직 배우의 삶이 이런 건가? 아픔과 슬픔, 역경은 온데 간데 없고, 그녀는 사람들에게 유부남을 꼬셔 만나다, 연하남에게 재산 털린 정신 나간 년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누구의 아픔을 이해할 거냐 싶습니다. 미국 땅이 정떨어져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난희를 만났죠. 난희에겐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 친구랑 남편이 침대에서 뒹구는 걸 봤으니, 뼈에 사무칠 일입니다. 근데, 억울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때 영원은 자기 친구를 죽어라 말렸거든요. 근데 사랑이 그런 거죠. 소용없었고, 난희에겐 정말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만난 난희랑 싸우고 싶지 않은데, 난희가 시비를 걸어옵니다. ‘썅’하고 돌아서는 난희. 이렇게 아웅다웅 사는 게 인생이지 싶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삶은 나쁘지 않습니다. 배우로서 귀국 후에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합니다.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암이 전이돼 투병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그녀는 여전히 현장에 있습니다. 주변의 쑤군댐에도 굴하지 않고 극중 친구나 선배들에게는 물론 정아의 딸 순영과 난희의 딸 완이에게까지 멘토 역할을 하며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다음은 난희, 영원의 2년 선배이며 희자, 정아의 후배인 충남(65세, 윤여정)의 이야기.
평소 “네가 왜 꼰대야? 나 처년데!”를 입에 달고 삽니다. 가난한 집의 열두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제 힘으로 야간 중학교를 졸업하고 열세 살부터 방직공장과 버스 안내양을 전전하며 어렵게 돈을 모아 자수성가한 독신녀입니다.
말 많고 유쾌하고 화끈하며 솔직한 그녀는 야외카페를 운영하며 늙은 형제들과 일가친척들의 생계와 부양을 도맡아 책임지고, 형편이 어려운 교수와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주며 지원합니다. 하루가 즐겁고 재미나게 살다 죽고 싶습니다. 운동도 하고, 매일매일 젊은 애들 틈바구니에서 양기를 마시고 사니, 건강도 자신 있습니다.
죽는 건 안 무서운데 늙는 건 싫습니다.
동문들보다 젊은 애들이 재미있습니다. 꼰대이고 싶지 않고 냄새 나는 것 같고 재미없고 지루한 꼰대랑은 놀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주변 꼰대들은 다 끊었는데 그 놈의 정 때문에 오지랖 때문에 동문들만 못 끊고 만납니다. 그런 그녀를 두과 완이(고현정 분)는 늘 이모도 늙었다. 꼰대다. 이모가 늙은이들과 놀기 싫은 것처럼 젊은 애들도 이모와 노는 게 재미없다고 충고하며 노후를 준비하랍니다.
완이는 제 엄마 동문회를 따라 카페에 왔을 때, 충남 주변의 무리들이 충남을 뒷담화하는 걸 들은 것이죠. 그걸 알지 못하는 충남은 완이를 제 엄마 닮은 년, 싸가지 없는 년으로 치부합니다. 그런데, 한날 복통이 났습니다. 수술이 이어지고 눈을 뜨니, 병실엔 하릴없는 늙은 동문들만 코를 파거나 코를 곯거나 하며 우르르 있습니다.
아 꼴 보기 싫어..
그리고 SNS을 확인했는데 바쁘다던 후배들이 놀러가 술 쳐먹고 찍은 사진을 봅니다. 젊은 것들이 지들끼리 모여 신이 난 듯 해맑습니다. 내가 고독사를 할 수도 있겠구나.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늙었음을, 늙어가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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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마프>에 등장하는 노인여성 가운데 최고 연장자는 난희의 친정엄마 쌍분(86세, 김영옥 분)입니다. 50여년 세월을 남편의 폭력과 외도에 시달리다 늘그막에 쓰러져 인지능력이 아이가 된 남편과 작업현장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가 된 아들 인봉을 챙기며 80대의 나이에도 밭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억척스런 시골노인입니다. 입만 열면 거친 욕설을 내뱉곤 하지만 남편의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글공부를 시키고 몇 년 동안 아픈 아들의 간병을 하면서도 항시 딸 난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마음아파 합니다. 80대의 노인들이 자기만 알거나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돼 갈등을 유발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이 드라마에서 쌍분은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딸 난희가 친구인 영원을 적대시할 때도 영원을 친딸처럼 품어주고, 독신인 충남이 위급할 때도 가장 먼저 달려갈 만큼 모두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어 주는 어른입니다.
반대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장 어린 여성은 극중 화자인,박완 (37세, 고현정 분)입니다. 난희의 외동딸입니다. 프리랜서로 일어 번역 작가 일을 하면서, 난희의 집 근처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습니다. 털털하고 직선적이다 못해 독설적이고 쿨하다 자신하지만, 쿨하고 싶은거고, 강하고 싶은 것일 뿐 마냥 그렇진 않습니다. 유럽으로 유학 가서 다섯 살 연하 애니메이션 작가 연하를 짝사랑 했다. 이 남자가 교통사고로 하반실 불구가 된 후 헤어져 3년 전 서울로 왔고, 이 친구랑은 매주 동영상 채팅을 하는 친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유부남인 회사 대표 한 국장과 썸도 아닌 친구도 아닌 애매한 사이에 있습니다. 어느 날 엄마 난희가 떼를 씁니다. 엄마의 동문회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완은 분명히 관심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엄마는 막무가내입니다. 번역만 하지 말고 요즘 시니어 얘기가 대세니 글을 한번 써보는 게 어떠냐 합니다.
‘엄마 말 되는 소릴해? 늙은이들 얘길 누가 읽어? 솔직히 관심 없어. 안궁이라고!’ 라고 했지만 끌려나간 동문회. 예상처럼 늙은이들 동문회는 두서 없고 정신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엄마의 상처를 알았습니다. 엄마는 남편이 제 침대에서 친구랑 뒹구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동문회장을 나와 그녀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시니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쓰겠다고 맘 먹은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엄마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완벽하게. 그래야만 자신이 바로 설 거 같았습니다. 그녀는 이후 이모들, 아저씨들과 본격 맞짱을 뜨며, 사흘들이 만나게 되는데, 싸우다 정든다고, 은근 재밌고, 신나고, 스펙타클합니다. 때때로 그들의 지혜는 바람처럼 상쾌하고 유쾌하며 빛처럼 찬란합니다.
<디마프>에는 이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 이를 통해 수많은 삶의 문제들, 아픔, 상처, 죽음, 오해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길게 이들의 캐릭터를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 이들 중 누군가는 나의 엄마, 이모, 할머니, 옆집 아주머니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리고 엄마때문에 속상할 때, 이모때문에 마음 아플 때 한번즈음 돌아보기 위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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