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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취리히의 아침 풍경



시차의 문제일까? 기나긴 금요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생각처럼 깊은 잠에 빠지지는 못했다. 게다가 너무도 일찍 잠을 깨버렸다. 새벽 530. 옆을 보니 그녀 역시 커다란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조식 먹으러 갈래?”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우리는 벌떡 일어나 1층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아침식사를 마치고 떠난 흔적이 한두 군데 테이블에 남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잠자리에 들어있을 시간이었다. 인도 어디 즈음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고 있었고 식당 가운데에 아침 조식이라고 하기에는 푸짐한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어질러진 일상을 정리하는 사람은 예상했던 것에도 조금도 비껴나지 않는 제 3세계 여성이군,하는 생각이 청소기를 돌리는 아주머니에게 굿모닝이라는 인사를 하면서 스쳐지나갔고, 푸짐한 식단의 1/3이 베이컨이고 1/3이 치즈, 나머지 1/3이 베이커리라는 점에서 이곳이 스위스군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식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맛있었다. 치즈의 종류도 베이컨의 종류도 빵의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전부 먹고 가겠다는 심정으로 부지런히 먹고 먹고 먹는 먹방을 찍었다.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참을 먹고 있는데 한 손에 책을 들고 나는 엘레강스 파리지앵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 여성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우리 옆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잔과 토스트 한 쪽을 먹으며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우리의 테이블과 그녀의 테이블은 극과 극으로 대비되었고 나는 거기에서 어떤 차이를 느꼈다. 그러니깐 그것은 일상과 여행의 차이였다. 그녀에게 이곳에서의 조식이란 아주 특별할 것 없는 치즈와 베이컨과 빵들이 그것도 저렴한 마트의 식재료를 사용한 고만고만한 일상의 연장성이었고, 우리에게 스위스에서 조식이란 서울에서 구경하지 못한 치즈와 베이컨과 빵들을 체험하는 여행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해석이고, 당시 내 안의 어떤 관성은 이 풍경을 약간은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깐 동양은 미천하고, 서양은 세련된 무엇으로 본 것 같다. 갑자기 나는 수북하게 쌓인 그릇들을 어디론가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먹는 속도도 KTX급에서 완행버스 수준으로 떨어졌다. 돌아갈 때 가져가려고 챙겨둔 몇 가지 잼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날 오후부터 나는 이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길 위에서 메마른 빵들을 넘기면서 호텔에서 맛있는 잼을 더 가져오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한 젊은 여성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의 행동을 떠올리면서, 잼을 챙기는 것을 무언가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 이것이야말로 체면과 눈치가 중요한 아주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모습이었다고 생각했다.



조식의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우리는 조용한 취리히의 한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개 한 마리가 털 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졸고 있었고 동네는 조용하고, 공기는 상쾌했다. 언덕 밑으로 흐르는 하천, 그 주변에 우뚝 솟아있는 가로수와 잘 정비된 녹지대는 이 아무 것도 아닌 공항 옆 작은 마을을 인상 깊은 한 공간으로 점찍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계획하지 않으면 절대 이룰 수 없는 환경이기에 나는 취리히에서 다시 한 번 서울과 모스크바를 떠올린다. 공항 근처 마을 한 켠만 하더라도 확실히 여기는 다른 곳이었다.

725, 우리는 호텔 앞에서 공항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 북부 어디 즈음에서 왔을 법한 한 가족이 우리와 같은 곳을 보고 있다. 짧은 커트 머리의 엄마, 팔뚝에 문신이 그려진 아빠. 그리고 두 아이. 아이 바로 옆에서 엄마, 아빠는 연신 줄담배를 피운다. 그 모습이 호텔 뒷 편에 소나무가 서있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넓고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다. 프랑스 식으로 말하면 봉쥬르한 광경이었다.


셔틀버스 운전사는 흑인 아저씨였다. 커다란 가방을 올리고, 내리고, 운전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가난한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본다. 그에게 스위스란 어떤 나라일까, 궁금했지만 내가 그에게 나눌 수 있는 메시지는 어이 친구! 고맙네.”정도뿐이다. 그리고 이후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큰 소리로, 작은 소리로 하게 되는 이야기도 대부분 고맙네!”정도일 것을 나는 안다.


사실 어떤 여행지에 대한 평가는 언어의 빈곤과 상관없이 고맙네를 어느 정도 했느냐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공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 말을 망각할 수밖에 없는 공간은 불편한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스위스는 끊임없이 고맙습니다를 남발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돌아보면 그래서 스위스는 관광으로 먹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Bahnreisezentrum Railway Cetner><Reiseburo Travel Agency>를 찾았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등을 혼용해서 쓰는 나라 스위스에서 많은 경우 이해할 수 있는 알파벳과 이해할 수 없는 알파벳의 조화로 텍스트와 사운드가 겹쳐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으로 필요한 알파벳의 조화를 수많은 상징물과 간판에서 찾아야 하곤 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스위스 열차 패스를 개시하는 오피스 공간을 찾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플랫폼을 찾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가 우리가 타야 하는 기차와 앉아야 할 2등석 칸을 찾는 일이었다.


360도 파노라마 사진을 찍는 듯 우리는 널따란 공항 기차역을 돌고 돌았고, 그렇게 오피스와 플랫폼과 기차를 하나하나 찾아가기 시작했다.

저기다.”

플랫폼은 지하 2층이야. 저기 엘리베이터 타면 돼.”

지금 오는 기차가 아니라 다음 기차를 타야 돼.”

여긴 1등석이고, 우리는 2등석 자리를 찾아야 돼.”

낯선 공간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과정은 재미있다. 우리는 그 과정에 조금은 흥분했고, 그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흥분하는 우리를 보며 정말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스위스의 기차에는 공통적으로 SBB, CFF, FFS라는 문구가 찍혀 있다. 정식명칭은 스위스 연방철도이고 SBB(Schweizerische Bundesbahnen)는 독일어, CFF(Chemins de fer fédéraux suisses)는 프랑스어, FFS(Ferrovie federali svizzere)는 이탈리어어의 약자다. 영어를 제외한 3개의 언어를 공히 사용하는 스위스는 언어의 다양성만큼 문화적 다양성도 풍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위스는 대한민국의 절반도 안 되는 면적에 다수의 언어가 섞여 있다. 독일과 가까운 북부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이탈리아와 가까운 남부는 이탈리어를, 프랑스와 가까운 서부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곳을 빠르고 편리하게 연결하는 기차는 이 모든 언어를 포월하고 있다. 그리고 스위스의 열차 시스템은 놀라우리만치 시스템화되어 있다. 우리 집에서 광화문으로 나가는 7018 시내버스보다 빠른 배차 간격과 시계보다 정확한 타임 테이블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 신속함과 정확성은 이동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줄이는 조건이다.



우리가 처음 갈 곳은 베른이었다.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으로 가는 기차는 취리히 국제공항을 떠나 취리히 도심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언니, 오빠들을 잔뜩 태우고 시골길을 빠르게 달린다. 오늘은 토요일, 취리히 역에서 단체 여행을 떠나는 듯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등산화를 신고 2층 기차칸 대부분을 채운다. 그리고 독일의 철학과 교수처럼 생긴 50대 남성과 그의 제자인 듯 보이는 20대 친구들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 옆에는 등산용 로프, 암벽화, 카라비너, 헬멧, 너트, 배낭 등 암벽 등반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오늘 오후 쯤 융프라우 어느 암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6월 마지막 주 스위스를 달리는 주말 기차는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한국에서 온 나와 그녀 정도다. 우리집 뒤편 북한산으로 가는 길에 주말이면 등산객들로 가득 차는 것처럼 스위스 사람들도 날씨 좋은 주말이면 알프스 산 어디론가 삼삼오오 몰려가는 듯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베른으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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