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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반갑다 취리히!



비행기에서의 오랜 시간이 부여한 감정들피곤함과 무력감문득 나의 삶이 자주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생각을 한다. 무표정한 사람들, 엔진소리의 건조함, 변함없는 창밖 풍경, 비좁은 좌석. 시간대별로 먹게 되는 맛없는 기내식. 처음에 이 비행기에 탑승할 때는 목표도 있었고 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버티고 있을 뿐이다. 어디로 가는지 처음의 설렘은 사라졌다. 그냥 비좁은 좌석에서 몸을 비틀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취리히 행 비행기에서 느낀 피로는 그 공간을 넘어 그것이 바로 내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닌지 그런 생각으로 번졌다.


안전벨트 등이 켜졌고 얼마 후면 취리히에 도착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고, 나는 생각보다 들뜨지 않았다.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예상했던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그런 것일 뿐이다. 누가 아주 잘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아주 잘못한 결과도 아니며, 그냥 예견했던 일이었다. 나는 단지 거기에 잠시 가담하고 있을 뿐이다. 여행을 위해. 잠시의 탈출을 위해. 좁은 자리를 참아내야 했고,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무표정을 감내해야 했던 것일 뿐이다. 그게 한편으로는 짜증이 났으며 한편으로는 그게 삶이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스위스에 도착하고 있지만 서울에서의 감정과 생각은 여전히 계속 나의 심신을 누르고 있는 거였다.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야.

 

비행기가 육지 위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 시니컬한 생각을 잠시 동안 이 비행기 안에 유폐시키기로 마음먹는다. 무기력과 무감각과 피곤함이여 잠시 안녕. 너희들이 조만간 다시 나를 찾아오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너희들 말고 다른 친구들을 만나야겠어.

 



취리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냥 잔디에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잠이나 실컷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초여름의 저녁 8. 해가 아직도 서쪽 하늘 한 켠에 묵직하게 달려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해?’

그녀가 묻는다.

그러니깐 그게...’

저녁 8시의 취리히 공항에서 난 우왕좌왕한다 첫날 묵을 곳을 예약도 해두었고, 교통편도 알아 놓았는데, 막상 공항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가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 거다.

인포메이션 센터

20세기, 그러니깐 구글과 아이폰이 없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커리어를 끌고 낯선 곳에 가면 들리게 되는 곳. 마치 여행 박물관 같은 그곳에 나는 그녀를 이끌고 들어간다.

여긴 왜 들어가는 거야?” 그녀가 묻는다. “그러니깐 그게 구글보다는 사람

인포메이션 센터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누가 보더라도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일할 것 같은 복장과 표정을 가진 여성이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묵을 곳을 이야기하면서 호텔 셔틀버스 정류장이 어디인지를 물었다. 그녀는 마땅히 그런 복장을 입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지도를 보며 세세하게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곳을 설명해준다..

우선 1층으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오른쪽 문으로 나가서 우회전하여 50미터쯤 가면 셔틀버스 표시가 보여요. 거기에서 기다리면 되요.”

내가 서울에서 구글로 찾은 내용과 일치하는 답변이었다. 왜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이것을 다시 확인해야했을까, 생각하면 내게는 우선 그녀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의 어설픈 검색질과 감으로 발길을 옮기지는 않겠다는 선언 비슷한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건 우리의 지난 여행 역사에서 늘 아픔으로 남은 두려움 같은 거다.


셔틀버스 정류장은 담배 연기와 하얀 현수막과 이런저런 호텔의 셔틀버스로 붐볐다. 현수막에 쓰여진 글씨들은 대부분 이해하기 힘든 알파벳들의 조합이었다. Flaghafen zurich, Marche. 수많은 독일어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서편으로 해가 지고 있는 저녁 9시 취리히 공항은 낯선 글자와 낯선 사람들로 붐빈다.




아이비스 호텔, 호텔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예쁘거나 독특한 것도 아니었다. 국제공항 근처에서 잠시 잠을 자고 떠날 사람들이 하룻 밤 머물기에는 깔끔하고 모던했다. 어쨌든 길고 길었던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는 거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낯선 여행의 공간에서 담배 한 대를 무는 시간의 행복은 사실 언어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는 거다. 체크인을 마치고 그녀를 먼저 방에 보낸 후 1층 테라스에서 담배 한 대를 문다. 주변을 살펴보니 호텔은 모던한 건물들과 작은 냇가와 낮은 하늘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다양한 톤의 초록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늘 위로 새 한 마리가 우아하게 아치를 그리며 날고 있었고, 여행객들은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면서 저물고 있는 하루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꽤 괜찮은 풍경이었다.

 

반갑다 취리히!

담배 연기가 어두워지는 취리히 하늘로 스멀스멀 올라간다

그나저나 맥주 한 잔을 마셔야 하는데, 맥주는 어디서 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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