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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모스크바를 지나면서

러시아 상공에서 본 풍경 (출처: http://ufokim.tistory.com)


비행기를 탈 때 늘 손에 작은 노트 하나와 책 한 권을 놓아둡니다. 막상 비행기가 비상하면 거의 아무 것도 보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왜 그럴까, 잠깐 생각해봅니다.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없다면 비행기타기 놀이가 매우 지루할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행, , 수첩 이것은 저를 설레게 하는 3종 세트인거죠.

 

모스크바를 경유해 취리히로 가는 비행기에서 제 손에 쥐어진 책은 무라카미하루키의 <댄스댄스댄스>였습니다. <댄스댄스댄스>는 제가 하루키 소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책을 가지고 갈까, 생각하다 이 책을 결정했던 것은 당시 마지막으로 수정 중이었던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 원고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 책을 정말 출간할 수 있는 걸까, 출간한다면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할 때 <댄스댄스댄스>의 양 사나이는 제게 이런 이야기를 넌지시 전해주곤 했습니다.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멈춰버려. 한 번 발이 멈추면 이미 나로선 어떻게도 도와주지 못하게 되고 말아. 그러면 자네의 연결 고리는 모두가 없어지고 말아. 영원히 없어지고 마는 거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쪽 세계에서밖엔 살아가지 못하게 되고 말아. 자꾸 자꾸 이쪽 세계로 끌려들고 마는 거야. 그러니깐 발을 멈추면 안돼. 아무리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데 신경 쓰면 안돼. 제대로 스텝을 밟아 계속 춤을 추어대란 말이야. 그리고 굳어버린 것을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풀어나가는 거야. 아직 늦지 않은 것도 있을 테니까.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쓰는 거지. 최선을 다하는 거야.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분명히 지쳐 있어. 지쳐서 겁을 먹고 있어.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 무엇이고 모두 잘못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거야. 그래서 발이 멈춰버리거든. 하지만 춤을 추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것도 남보다 멋지게 추는 거야. 다들 감탄할 만큼 능숙하게. 그렇게 하면 나도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계속되는 한." (댄스댄스댄스 중)

 

여행이라는 것은 제게 낯선 공간을 배경으로 양사나이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일상세계에서 춤을 추는 용기를 얻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굳이 수많은 책 중에 <댄스댄스댄스>가 배낭에 선택되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댄스댄스댄스>를 열심히 읽은 건 아닙니다. 사실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거의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주로 했던 것은 좌석 앞에 놓여 있는 디스플레이를 클릭하고, 영화를 선택하고, 좀 보다가 다른 영화를 찾아 들어가고, 비행기가 어디 즈음을 날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네비게이션 비슷한 메뉴를 클릭해 들어가고, 음악을 듣고, 오렌지색 약간은 촌스러운 복장을 한 스튜어디스 언니들을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스튜디어스 언니들을 떠올리니 왕좌의 게임” 7왕국 중 북쪽 왕국들이 떠오릅니다. “겨울이 오고 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스타크 가문, 성벽 밖에 사는 이름 없는 거칠 것 없는 존재들. 날 것의 거침없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 광활한 기개 이런 느낌이 오렌지색 언니들에게 강하게 묻어있는 겁니다. 러시아 항공의 스튜어디스 언니들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무표정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에서 전 러시아 항공에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비프 앤 피쉬? 아주 간단한 영어 한 마디에 뭔가 대단한 위엄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비... .. 라고 숨죽여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 할까요?


러시아 상공에서 본 풍경 (출처:http://ufokim.tistory.com)


이 분위기는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순간 좀 더 분명해집니다. 착륙하는 비행기 차창 너머의 풍경을 보면서 여기에서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인류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웅대한 기골과 무표정과 강인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원이란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구나를 보여주는 숲, 황량해 보이는 거대한 평원, 낙후한 빌딩, 영국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부감으로 보여지는 모스크바의 전경 속에서 충분히 그려집니다. 러시아 사람들의 기골, 성향 역시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됩니다. 이런 곳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하기는 쉽지 않겠구나, 사람들은 강인할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겁니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2시간 남짓 대기하면서 마주한 것은 무표정, 웃음기 없는 대화, 푸틴의 티셔츠, 장대한 거구들이었습니다. 확실히 평범하지 않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푸슈킨, 이 무표정의 공간에서 너무도 많은 대문호들이 탄생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확실히 배경 자체가 수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가 갈등, 고통, 상처, 절망, 분노, 불안,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라면 러시아는 이야기의 보고일 거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겁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스위스 취리히까지는 비행기로 약 3시간 30분이 걸립니다. 비행기가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풍경은 확실히 바뀝니다. 척박함, 황량함, 야생성이 따뜻함, 정겨움, 평화로움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합니다. 이동과 함께 어떤 위안도 느낍니다. 서울의 불안과 욕망, 인천 공항의 메르스 공포, 모스크바의 척박함과 거침, 그 뒤로 도착할 곳이 스위스라는 데에서 마음의 평화가 오는 겁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내게 필요했던 건 본능적으로 스위스로 표상되는 평화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와 무관하게 몸은 점점 지쳐가고 시들어져갑니다.알프스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설레는 마음과 상관없이 제 눈동자와 표정은 지겹다며 아우성을 치는 겁니다머릿 속이 빙글빙글 같은 곳을 맴도는 느낌입니다우리 집의 오래된 오디오가 가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음악을 재생하는 것처럼...옆에 앉은 스위스인들은 무료한 또는 평화로운 일상의 동반자인지 수도꾸와 잡지 구석에 있는 낱말 맞추기 게임을 합니다.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거야?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분명합니다. 졸립다... 댄스댄스댄스. 춤을 추기도 전에 몸은 기진맥진. 도대체 지금 나는 어디있는 건가? 그때 누가 흔듭니다. 피프 앤 피쉬? 또 밥이야? 휴~ 기내식도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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