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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찬

공항으로 가는 길


처음 스위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계획은 오롯이 체르마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군요. ‘다시 스위스에 올 날이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다는 조바심, 꽤 먼 길을 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왔다는 생각이런 마음이 체르마트만을 오롯이 여정의 시작이자 종착점으로 기획할 수 없게 만드는 거지요


저 스위스 갑니다.” 이 말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추천하는 곳 역시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융프라우호에서 신라면은 먹어봐야 한다, 베른에서 꼭 자전거를 타야 한다, 레만 호수의 올레길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하는 곳이다, 중세시대를 느낄 수 있는 장트르 갈렌은 숨은 명소다, 세인트모리츠에서 체르마트까지 빙하특급은 꼭 타야 한다, 하이드의 마을 마이언펠트는 꼭 들려야 한다 등등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에서 누구든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몇 군데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루트를 짜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유념할 것은, 처음의 기획의도를 잃지 않는 것, 그러나 그 기획의도가 나만의 고집이 되어, 경험할 수 있는 새로움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내게 주어진 시간과 예산의 제약을 무시하지 않는 것. 그렇게 제가 노트에 적은 여정은 취리히, 베른, 체르마트, 레만호수, 인터라켄, 그리고 루체른으로 이어지는 여정 이었습니다여행의 루트를 짜는 과정은 여행만큼 재미있는 시간입니다.  오히려 여행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지 않은 미래는 희망과 들뜸과 낭만으로 가득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모든 직딩인들이 그런 것처럼 장기 여행 전에 처리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의 잠정적인 매듭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행 전 날 밤, 저와 M은 해야 할 일들을 꾸역꾸역 마무리짓고, 온 몸이 흐물흐물해진 채로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소파에 누웠습니다. 비가 내렸고, 뭐라고 할까 빗물 사이에 우리의 몸이 꽉 끼인 느낌이었습니다. 움직이기도 싫었고, 그냥 거실 소파에 늘어져 TV 리모콘이나 돌리면 좋겠다는 바람이 가득 했다네요.

짐을 싸야 하지 않을까?”

마치 의무감처럼 베란다 창고에서 배낭을 꺼냈고, 한숨을 푹 쉬며 가져가야 할 준비물들을 하나하나 적어보기 시작했더랍니다. 그리고 배낭에 준비물들을 넣기 시작한 순간. 마치 도인들이 기공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느껴질법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그렇지. 떠난다는 것은 이런 거지?”

꽉 끼인 일상에서 탈주하는 순간, 우리 안에는 다시 이상한 힘이 생기는 겁니다.




다음날 아침, 작은 배낭 하나씩을 짊어지고 트렁크 하나를 끌면서 M과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선명한 아침 햇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잿빛 하늘이 두텁게 서울 주변을 감싸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이런 날씨에 공항으로 달려가 구름을 뚫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맑은 하늘이었다고 이 설렘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깐 이미 내 마음은 여행이라는 글자로 모든 주변의 목소리를 들뜸과 설레임으로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이지요.


시내버스를 타고 홍은동 힐튼호텔 앞에서 내려 공항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아저씨를 만났어요.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베이징 어딘가로 돌아가는 여행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멋드러진 콧수염을 기른 50대 한국인이더군요. 그의 트렁크는 손잡이가 고장난 채 정류장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는 콧바람을 부르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 가시는 거요? 딱히 이 질문이 중요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같은 여행자로서 자신의 여행담을 둘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는 미국 하와이에 자리 잡은 한인이었고 매년 몇 차례씩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마카오에 가는 길이라며 자신이 배낭여행으로 중국과 동남아를 얼마나 자주 여행하는지를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설픈 호텔보다 게스트하우스가 안전하고, 자신의 이 고장난 트렁크가 지난 20여년 동안 얼마나 많은 도시와 게스트하우스를 스쳐지나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여행을 하기로 발을 딛는 순간 이야기도, 관계망도 달라지는 것일까요? 매번 스쳐지나가는 버스정류장에서 여행자를 만나고, 그와 낄낄대며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잿빛 하늘 밑에서 신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짧은 대화 중에 공항버스가 왔고, 그렇게 그와 우리는 여행 즐겁게 하시구요!’하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습니다.


매일 출근하던 길에서 벗어나 인천 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사야 할 것, 해야 할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진통제, 환전, 휴대폰로밍, 멀티어댑터 구매, 부모님께 전화 등등. 버스에서 내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발권을 하고, 진통제를 사고, 환전을 하고, 휴대폰로밍 등등 해야할 일들을 끝내자 또다시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왜 또다시 피곤할 걸까?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공항을 오가고 있었어요. 당시 서울은 메르스로 시끄러웠고, 그리하여 인천 국제공항은 메르스를 두려워하는 자와 메르스로 피곤한 자들의 게이트가 되어버렸던 거죠. 마스크, 메르스 경고 문구 등에 압도되다 보니, 과연 우리는 스위스에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들었고, 도대체 내가 사는 서울이라는 공간은 왜 이 모양이야, 이런 질문도 들기 시작했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더군요. 이에 더해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운이 빠진 상황이기도 했죠.

밥 먹을래?”

밥을 먹자는 제안은 피곤해진 내 얼굴을 보며 M이 먼저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공항 2층에 마련된 식당가로 올라갔습니다. 피곤해지자 단호함이 사라져버린 건지, 만사 귀찮아진 건지, 뭘 먹을지를 한참을 고민하는 시간이 흘렀고, 메뉴를 겨우 선택하자 이제는 1인분을 시킬 것인가, 2인분을 시킬 것인가를 가지고 M과 한참을 토론해야 하는 시간도 흘렀고, 그 토론의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스쳐지나갔으며, 메르스가 넘실대고 있을지도 모르는 공항 2층은 벽으로 꽉 막혀있는 구조였고. 이 모든 것이 피곤함과 짜증으로 다가왔습니다. 애써 그런 표정을 누르고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티나는 심술꾸러기 아이 표정. 


M은 "이게 한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이라며 저를 우쭈쭈했고, 김치찌개 1인분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자, 그 양에 압도되어 2인분을 시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깔깔 웃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이라고 강조했으며, 기분이 좋은 척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그렇게 깔깔 웃으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기세를 몰아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죠. 저한테는 그날 공항에서 했던 일 중 가장 어려웠던 일.

아버지, 저 다음 주 일요일까지 한국에 없어요. 연락이 안될 거에요. 돌아오면 전화할게요.”

조심히 다녀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니깐, 나의 아버지는 나만큼 여행을 좋아하던 남자였으며, 나의 어머니는 스위스를 평생 가보고 싶어 하던 그런 여자였던 것이죠. 그러나 막상 아들과 딸이 성장해 부모님께 여행자금을 들이면 그 돈을 모으고 모아 다시 아들과 딸에게 주고 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거죠. 여행과 스위스는 생각만으로 머금고 사는 그런 부모님



그런 부모님의 삶과 메르스의 분위기를 뒤로 한 채 우리는 마침내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비행기에 올라타기 직전 내가 한 마지막 행동은 담배 한 갑을 산 것. 이 담배를 필까, 피지 않을까,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순간에 그것이 없다면 여행은 참 슬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더랍니다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부모와 메르스를 뒤로 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배낭 뒤에 담배 한 갑을 보험으로 놓아둔 채.. 그렇게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서쪽 하늘로 부루룽 ~  나의 뱃 속은 부루룽~ 김칫국물로 든든합니다. 그런데 기내식 메뉴는 뭘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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