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예찬

마흔, 다시 여행



2015, 마흔이라는 나이는 나의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분기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분기점에 실질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흔이 되면 이래야지 하는 굳은 결의가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구요. 하지만 마흔 살이라는 작은 언덕을 건너면서 이제껏 걸어온 길과 다른 길이 펼쳐질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이런 막연한 예감은 대부분 비껴가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어제와 다른 길 위에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는 오롯이 내 선택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 역시 내가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싫든 좋든 마흔이라는 작은 봉우리 위에서 내가 선택하는 길은 좋든 싫든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빽도가 불가능하며, 그것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뭐 재미있는 일 좀 없을까? 30대에 놓쳤던 무엇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려운 것은 하나.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일상에 어떤 안정감이 부여되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조건이 만들어진 겁니다. 이건 내 스스로가 원하던 것이기도 했고, 이 때문에 게을러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어느 시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편안함의 이유로 달성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먼 곳으로 여행을 가자고 마음 먹은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에만 있다가는 일상의 습관, 관성, 편안함, 그 반대의 무력감, 불안함, 스트레스에만 얽매여 그냥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많은 길 위의 감정을 놓칠 것 같았고, 사람들을 놓칠 것 같았으며,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나는 살아있고 싶지만, 그 살아있음은 한 곳에 정주하는 것만으로는 도대체 살아갈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상을 새롭게 재편하기 위해서라도 떠남은 필수였습니다.


마흔이라는 숫자는 30대 초반 이후 유예되었던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였지만, 사실 이것은 사후적인 의미부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솔직한 계기는 저는 어느 날 문득 다시 떠나고 싶어진 겁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떠나고 돌아왔고, 떠나고 돌아왔고, 이후 아주 조금은 변하고 있음을 느낌니다.


여행예찬은 이 떠났던 시간을 기록합니다. 돌아온 후 바로 적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정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돌아보는 방식으로 여행기를 정리할 생각입니다. 시간의 공백이 생기면 적어도 그 시간을 너무 뜨겁지 않게 돌아볼 여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여백 위에 다양하게 변해가는 풍경과 사건 속에서 내가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놓은 몇 자의 이야기와 일기장에 적어놓은 기록들, 그리고 사진을 토대로 나의 눈으로 본 것과 나의 귀로 들은 것, 그리고 내 몸이 느낀 것을 담담히 문자로 만들어내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나의 몸을 관찰하고 훈육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깐 나는 마흔이라는 지점에서 어제와 다른 나의 몸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서 여행을 하고 그만큼 다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일단 첫 번째 기록은 스위스입니다. 스위스로 떠났던 것은 2015년입니다. 마흔의 첫 번째 여행지로 스위스를 선택한 이유는 심플했습니다. “체르마트에 가고 싶다차량통행이 금지된 청정마을, 파라마운트 로고이기도 한 웅장한 마테호른, 그리고 알프스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수백 개의 트레킹 코스. 오롯이 스위스 취리히 행 비행기표를 예약한 것은 체르마트에 가고 싶어서였습니다. 그곳에서 한 달 내내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깐 제게 스위스는 곧 체르마트였습다. 거기에 융프라우 인터라켄이 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베른이 있고, 포도밭과 레만 호수가 마주한 라보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체르마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장기 여행을 준비하다보니 의외로 어색한 것이 많더군요. 숙소 예약은 어디서 해야 하지? 싸게 예약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교통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동선은 어떻게 짜야 할까? 여행을 완벽한 스케쥴에 맞추어 다니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일상은 자주 그런 기획의도를 배신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계획은 불가피했습니다. 우선 전체 일정 중 앞뒤 이틀씩은 숙소를 예약해두기로 했습니다. 환불이 불가능한 예약 조건으로 호텔을 찜해두면 가격은 50% 수준으로 할인되더군요. 호텔어드바이스, 에어B&B 등 수많은 여행 사이트는 어떤 숙소가 어떤 면에서 좋고 아쉬운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창구였습니다. 세월이란. 제가 젊은시절 나름 배낭여행의 고수였는데, 그때 누가 이것저것을 물어보면 전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딴 것 다 필요 없어. 론니플래닛! 이 한권만 제대로 봐도 충분해!” 이제 이런 이야기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된 것 같았습니다.


론니플래닛이든, 인터넷 여행사이트이든, 결국 여행을 준비한다는 건 거창해보이지만 대부분 이런 잡다한 일상의 해결이 대부분입니다. 여행이란 낭만적인 언어 밑에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 많은 시간을 그렇게 또다시 일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잘 곳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것이 있어야 하며, 움직일 수단이 있어야 하는 겁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일상의 담보란 서울에서도 스위스에서도 중요한 것이 됩니다.


스위스 여행의 준비는 100% 저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니깐 비정규직 시간강사였던 M은 출발 직전까지 서울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로 분주했고, 여행과 관련한 모든 일정과 계획은 남편인 저의 몫이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게 재미는 있지만 부담도 있습니다. 왜냐면 일정이 꼬이면 당연히 그것의 책임은 오롯이 기획자의 몫이고, 내게는 몇 년전 실패한 기획으로 M과의 여행을 망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 시간을 복원할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2009년 우리의 삼십대 마지막(그때는 그게 마지막일줄 몰랐지만~) 장기 여행으로 호주 퍼스 지역과 인도네시아 발리를 여행했는데요, 희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 시절 여행이 실패한 이유는 심플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젊은 20대인 줄 착각했고, 아무런 기획도 없이 여행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겁니다. 지금 돌아보니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는 장기 여행은 자주 비극으로 끝났던 것 같습니다. 2004년인가, 갑작스럽게 캐나다로 날라가 두 달 동안 한인 타운 근처에서 배신과 사기와 눈물의 감자탕을 먹으며 지냈던 시간 역시 돌아보니 계획의 부재로부터 초래한 비극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삶도 여행도 꽉 짜여진 계획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길을 가고자 마음 먹었을 때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 그 길에 가기 위한 준비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삶이라는 것은, 여행이라는 것은 그런 계획과 자주 무관하게 가지만 말입니다.



1회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회부터는 본격적인 스위스행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떤 이야기일지, 저도 궁금해집니다. 다시 스위스로 여행을 준비하는 듯한 설레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일요일 아침입니다. 굿모닝.


 

'여행 예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덕 위의 도시, 베른의 어느 여름날 풍경  (0) 2018.05.27
취리히의 아침 풍경  (0) 2018.05.25
반갑다 취리히!  (0) 2018.05.12
모스크바를 지나면서  (0) 2018.03.04
공항으로 가는 길  (0) 2018.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