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견만리, 개천용은 어디로 사라졌나편을 봤습니다. 프리젠터는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였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나라는 근면함과 교육열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그 근본은 바로 사람이었다. 부모의 고향, 계급과 무관하게 다양한 개천에서 용들이 나왔고, 이들이 성장을 이끄는 주역이었다. 그런데 고성장의 시대가 끝나면서 개천에서 용이 거의 나오지 않는 세상이 도래했다. 둔화된 경제 성장, 치열한 일자리 경쟁, 심각한 부의 양극화. 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갈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 시대의 용을 키워낼 수 있을까?”
왠지 용하니깐 미드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떠오르는데요. 김희삼 교수님은 개천에서 용의 비상이 어려운 게임의 불공정성에 대해 강하게 질타합니다. 과거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아무리 지금 가난해도 훗날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죠. (떠오르는 사람은 좀 시니컬하게 이야기하면 이명박, 김기춘, 우병우이지만 이들이 전부는 아니니깐...) 그러나 지금은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서 개천에서 용은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카메라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서울 신림의 한 자취촌을 찾아갑니다. 25세 한 취업준비생의 일상. 일어나자마자 키즈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오후 2시에 또다른 알바를 합니다. 한 달에 최소 100만원은 벌어야 서울에서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취업준비는 언제 할까유? 이런 친구들은... ㅜㅜ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걸 보면, 저도 이제 어른이 된 건 분명합니다. 어제 운동을 마치고 안국역 근처 분식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데 대학생 3명이 옆에서 라볶기와 김밥을 먹고 있는 거에요. 이들의 이야기 역시 온통 취업과 알바 이야기더군요. 방학 때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는데 사장이 세금문제 때문에 현금으로 알바비를 주더라는 이야기, 고용계약서를 쓰고 알바를 했다는 친구와 그 이야기에 놀라는 친구들의 리액션, 월급에서 세금이 얼마 떼였다는 슬픈 목소리와 나는 안 떼여서 다행이라는 목소리, 다음 주 진행할 조별 프로젝트와 새로 시작할 알바에 대한 이야기 등등. 알바 천국이 그냥 나오는 광고 카피가 아닌가 봅니다. 저도 대학 시절 알바라면 안해본 게 없는데, 그 시절의 알바와 지금의 알바는 좀 다른 느낌이에요. 20년 전 제가 했던 알바들이 경험과 추억과 낭만의 영역이라면, 명견만리에서 그리고 어제 분식집에서 만난 알바는 생존 영역에 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20년 전 제가 알바를 하는 시간에 제 친구들은 당구를 치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IMF가 터지기 직전이었고(전 96학번이랍니다), 선배들은 막 운동하고 술먹고 놀아도 취업은 어디든 되던 시절이었죠. 내가 알바를 한다고 경쟁에서 불리한 게임이 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었던 거죠. 물론 군대를 제대하고 2000년에 복학하니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지만, 그때 역시 과거의 관성 때문인지 취업준비에 올인하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대학이 취업공장이 아니었던 거죠. 여백이 있었고, 알바를 한다고 내가 공부나 취업에서 불리해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죠.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닌가봐요. 알바와 취업준비를 동시에 하는 친구와 취업준비에 올인하는 친구 사이에는 명백한 거리가 생기는 형국이 되어버린 거죠. 이 거리감이 커질수록 형식적 공정함만을 가지고 실질적인 공정함을 취하기 어려워지는 건 분명하구요, 이미 불공정한 게임에서 개천의 용들이 비상할 일들은 점점 더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거죠.
씁쓸한 현실은 서울, 도쿄, 홍콩의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성공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뭔지를 묻는 걸 통해 명확해지네요. 결과가 웃픕니다. 가까운 도쿄와 홍콩은 재능과 노력을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이야기하는 반면에 한국은 “부모의 재력”을 중요한 요소로 꼽네요. 알고 있지만 이런 국가 비교를 통해 보니깐 너무도 화가 나더라구요. 며칠 전 시작한 TVN 주말드라마 라이브 1회를 보면 경찰공무원을 준비한다고 정유미가 아버지한테 2000만원을 빌려 노량진에 들어가는 모습이 있는데요, 그러니깐 수천 만원의 돈이 없으면 아예 취업준비도 못하는 겁니다. 부모의 재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되는 이유겠죠.
같은 맥락에서 김희삼 교수는 4개국 4천명을 대상으로 “당신의 나라에서 청년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를 물었다고 해요. 중국과 일본은 재능이 1등으로 나왔구요, 미국은 노력이 1등으로, 그런데 한국은 부모의 재력이 50.5%로 1등이 나왔다고 하네요. 참참참.
정말 그렇다면, 정말 그렇기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너무도 재미없는 세계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의 빅히트는 아무래도 의성 마늘 소녀 “영미!” 여자 컬링팀일 텐데요, 왜 사람들이 영미에 열광했냐면, 개천에서 날아오르는 용의 비상을 구경한 거거든요. 그것도 실시간으로 가슴 쫄이면서.... 그런데 부모의 재력에 의해 메달 순위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영미!를 외칠 수 없는 올림픽이라면 울마나 올림픽이 재미없을까요?
사실 어느 정주사회에서든 빈부격차가 있고, 사회 불평등과 계급이 있기 마련이죠. 문제는 이 격차가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다리가 있느냐, 사다리가 하나냐, 수십개냐, 사다리 오르는 게임에 공정함이 있느냐, 이런 건데요. 김희삼 교수는 우리나라의 사다리 옵션이 너무 적고, 사다리 칸이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을 넘어 끊어지고, 사다리 아래쪽의 삶이 점점 힘겨워지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는 결국 대학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데요, 우리나라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이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비용에는 큰 차이가 있죠. 사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비용의 격차가 대학의 격차로 이어지고, 그것이 취업과 성공의 격차로 이어진다는 게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세상”의 핵심 근거인데요. 최근 신한은행에서 ‘2018년 보통 사람들의 금융생활’이라는 조금은 흥미로운 조사 하나를 발표했어요, 이 조사에 의하면 초등생 이하 자녀를 둔 2030세대 가구 중 소득 1구간(하위 20%)의 월 평균 소득은 244만원인데 이중 교육비에 들어가는 돈은 23만원이라고 해요 반면 소득 5구간(상위 20%)의 월 평균 소득은 912만원, 이중 교육비에 들어가는 돈은 60만원이라고 합니다. 거의 3배 차이죠.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40대는 어떨까요? 소득 1구간 월 평균 소득은 273만원, 교육비에 50만원을 쓰구요, 소득 5구간 월 평균 소득은 941만원, 교육비에 126만원을 쓴다고 합니다. 모든 부모가 자녀를 위해 과도하게 교육비를 쓰고, 그렇지만 부자 아빠를 가난한 아빠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지요.
공교육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교육비의 차이, 부모의 경제력 차이가 대학 서열의 차이, 더 나아가 대학에서 스펙쌓기와 취업투자 비용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것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요. 대치동 학원가에서 너무도 똑똑한 선생님들에게 너무나 스마트한 족집게 교육을 받은 친구와 공공도서관과 차가운 교실에서 나 홀로 공부를 한 친구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격차가 있기 마련이죠, 게다가 방배동 학원가의 스타벅스에 모인 부모의 정보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입시를 준비할 수 없게 된 복잡한 대학 입시 시스템에서 개천에 사는 자녀들은 어찌하오리까? 누가 이런 이상한 세상을 만든 걸까요? 누가 부자 아빠의 자식, 부자 할머지의 손녀에게 너무도 유리한 게임을 만들어낸 걸까요?
김희삼 교수는 이에 대해 이런 울분을 터뜨립니다.
“과거에 교육이 계층이동의 열쇠가 되었다면 지금은 그것을 가로막고 오히려 교육이 격차를 재생산하는 폐쇄의 자물쇠가 되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구요.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구조를 재생산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 도처에서 오랫동안 관찰되는 바인데요. 이를 이야기하는 대표적 학자가 ‘구별짓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입니다. 그의 책은 어렵지만 주장은 의외로 간단하고, 근거도 명확합니다.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 강화에 기여한다!
부르디외는 어떻게 교육의 구조적 조건이 계급적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고 문화 자본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대부분의 대학 졸업장이 상류계급 출신에게 돌아가고, 농민·노동계급 자식들에겐 거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데요, 그렇다고 예외가 없는 건 아니죠. 그런데 부르디외는 극소수에서 허용하는 예외가, 그러니깐 개천에서 난 용들이 오히려 사회적 변화보다 안정에, 계층이동보다 계층고착화에 기여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떠세요? 개천에서 용이 탄생하는 일이 많다면 재미있겠지만, 그렇다고 계급불평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용보다 이무기가 훨씬 많다는 것도 이런 능력주의 신화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구요. 왜 모두 용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시니컬한 질문이 드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의 탄생은 언제, 어디서든 재미있으니깐, 무엇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없어진 신분제사회는 자멸로 가는 길이 분명하니깐 이런 저런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이긴 한데요, 이에 대한 김희삼 교수의 해법은 무엇일까요?
“저소득층 지역에 무료로 공부나 취미활동을 가르쳐주는 공공 학원을 만들자!”
“형식적 평등을 넘어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가 필요하다. 지역 균형 전형, 기회균형 전형을 확대하자!”
“교육 사다리 개념을 재구축하자. 하나의 긴 사다리가 아닌 짧지만 다양한 사다리를 구축하자.”
“획일화된 교육 과정을 지양하고, 토론형 수업, 선택형 교과수업을 넓혀가자”
“홍콩 교육 개혁 리포트의 표제 사진은 자유롭게 나는 새다.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 그 첫 단추는 수업방식의 변화다. 이미 정해진 답을 찾는데만 익숙한 기존의 체계를 넘어 질문과 토론과 주도성이 넘치는 교실을 만들자.”
사실 현재의 한국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개천에서 용”을 나게 하는 게 아닐 겁니다. 물론 가난한 집안의 똑똑한 친구들이 강남의 부잣집 애들에게 정당한 기회를 빼앗기는 건 부당하고, 이에 대한 보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반에서 1등을 다투지 않는 다수의 친구들, 이들이 행복하게 공부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하고, 공부가 아니더라도 공교육 체계 내에서 학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재능의 씨앗을 발견하고, 다양한 루트를 통해 육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합니다. 김희삼 교수의 대안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대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쉬움은 모두를 아우르는 추상적인 답변이어서 구체적인 대안은 또다시 물음표로 남는다는 것. 명견만리라 하기에는 뭔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
사실 교육과 관련하여 이 문제가 수십년 동안 반복재생산된 거를 염두한다면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라는 걸 기대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리고 대학이 곧 졸업 후 “계급”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이 문제의 대안을 교육 생태계 안에서 찾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뭐 어쩌라구?하면 저라고 뭐 뾰족한 답이 있겠습니까?
다만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개천이 좋아지나? 이제껏 그런 경험적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개천에서 난 용은 개천을 떠나고 그곳을 잊죠. 그렇다면 왜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하는 걸까요? 이 프레임에서 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재적 용들을 서울 관악산과 강남 사이로 이전시키기보다, 개천에 머물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둘째, 부모의 재력이 문제라면 부모들 사이의 임금 격차를 줄이지 않고는 교육 문제 해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서울 대학 졸업성과 지방 대학 졸업생, 대졸자와 고등학교 졸업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임금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부모들이 자식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려는 마음은 커질 수밖에 없고 절대 교육 문제에 답을 찾을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중요한 문제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 해소도 중요한 문제이며, 직무, 직종, 직급, 고용형태, 산업 영역에 따라 임금의 차이는 인정하되, 이 차이가 너무 과도하게 벌어지는 것을 사회적인 위기로 인식하고 보정하는 작업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봐요. 쉽지 않다니깐요. 그러나 정말 어려운 문제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게 왜 어려울까요? 하물며 제가 밥벌이 하는 공영 섹터에서조차 이 문제는 너무너무 어렵다고 하소연들입니다. 어렵긴. 뭐가 어려워? 좀 해봅시다. 그래야 명견만리이고, 퍼블릭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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