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병은 나의 모든 습성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 부여하였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무지와 게으름은 환상의 커플이다. 살 만하다,는 게 늘 문제다. 웬만큼 살 만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게 볼 기회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아파야 비로소 보게 된다.
(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P. 5)
고미숙 선생님이 쓴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서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마흔 줄에 들어선 초입, 그러니깐 30대에 비해 웬만큼 살 만하다고 스스로 느끼기 시작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갑자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어디서든지 강골이라고 우기던 저는 감기몸살에 시름시름 앓더니 그 겨울 내내 이불 속을 뒹굴었습니다. 왜 그런지도 모른 채.
그러다 저 책을 읽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몸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세상은 그렇게 두리번거리면서 어떻게 이렇게 내 몸에는 무심할 수가 있었던 거지? 이 책을 읽고 좀 아쉽다싶어 이런 저런 의역학 관련 책들을 주서 읽기 시작했고, 어떤 인연으로 기공과 태극권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한 일은, 그리고 2년, 저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웬걸? 이번 겨울 들어 다시 2년 전 증상이 재발ㅜㅜ B형 독감에 걸렸고, 겨우 풀려났다 싶으니 몸살에 걸렸습니다. 더 큰 문제는 뭔가 몸과 마음에 큰 돌덩어리 하나가 얹혀있는 느낌이 있는 겁니다. 문득 문득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고, 가슴이 턱 막히고, 에이 별거 아니야,라고 넘어가기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균형감이 무너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 주말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지독한 나쁜 습관에 빠졌다. 이것처럼 확고부동한 것이 있을까? 이 중력장을 다시 해체하자. 다시 몸을 써보자. 그걸 위한 초식을 마련하자. 이게 <몸을 쓰다> 공부의 목표입니다.
무슨 이야기부터 쓸까하다, 일단 개인적인 당면과제이자 몸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한 감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려합니다.
감기(感氣)는 말 그대로 ‘기운을 느낀다’는 뜻이죠. 병리학적으로 보면 여기서 기는 좋은 기운이 아니라 나쁜 기운이겠죠. 우리의 몸은 늘 외부의 기운에 반응합니다. 바람, 온도, 습도, 미세먼지. 이 기운이 들어와 때로는 내 몸과 좋은 합을 보이지만 때로는 몸에 문제를 발생시키는데요, 감기란 우연치 않게 들어온 기운이 내 몸의 항상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첫 번째 신호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병의 시작을 감기라고도 하고, 모든 병은 감기의 또다른 버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 그럼 감기를 바라보는 서양과 동양 두 가지 시선과 예방 레서피를 살펴볼까요?
일단 서양. 서양에서는 감기를 바이러스가 체내에 침입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바이러스는 겨울철에 잘 증식합니다. 낮은 습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온도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와사키 아키코 예일대 면역생물대 교수팀이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했어요. 온도 조건을 37도와 33도에 맞추어 놓고 코감기의 주원인인 라이노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반응을 비교한 거죠. 결과가 어땠을까요? 바이러스 침입에 대항하는 1차 면역반응을 담당하는 인터페론의 양이 37도일 때보다 33도일 때 1/3가량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항마의 힘이 줄어들다보니 당연하게도 라이노바이러스의 수는 4배 이상 늘었구요. 체온이 떨어지는 겨울철 감기가 창궐할 수밖에 없는 이유겠죠. 한마디로 코를 따뜻하게 해라! 이게 서양 의학에서 말하는 감기를 대처하는 가장 즉각적인 레서피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집안에서 있어라! 이건 아닙니다. 춥다고 실내에만 머물러도 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네요. 햇빛으로 우리 몸에 합성되는 비타민D가 감기에 맞짱뜨는 면역세포 형성을 돕고 기능을 강화하기 때문이죠, 춥더라도 문밖으로 나가 태양을 향해 쏘는 게 겨울철 건강 비결이랍니다. 단, 코는 따뜻하게 ^^
다음으로 동양. 동양에서는 일상을 몸과 외부 사이의 기싸움으로 묘사합니다. 이 기싸움의 균형점이 깨질 때 각종 병들이 나래를 펴고, 그 시작이 감기인데요, 그리하여 이 감기의 원인을 무슨 무슨 바이러스때문이다!라고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같은 감기 바이러스라 하더라도 내 몸과 어느 순간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그 감응이 달라진다는 거죠. 감기는 춥거나 건조한 날씨에만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바이러스가 1차 관문인 코를 넘어 몸속으로 들어왔다고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바로 그 순간 내 몸의 조건이 문제라는 합니다. 한마디로 감기에 걸렸다는 것은 “야 너 정기가 허해졌어. 그것도 못이기냐! 닥치고 정기를 보해라!” 이런 마음으로 낮은 포복으로 정을 보하면서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약해진 내부 기운을 살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동양에서는 감기와 같이 외부에서 오는 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병들의 베이스캠프에 해당하는 천지운기, 즉 하늘과 땅의 운행 기운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이른바 풍한서습조화 육기에 대한 이해.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조금 복잡하니 다음으로 미루고, 감기를 발생시키는 데 가장 영향력이 큰 기운은 풍(風)과 한(寒)의 기운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하죠? 바람과 추위. 이 기운이 너무 과하거나 부족하면 사기(邪氣)가 되어 몸에 침입하여 병이 됩니다. 사기란 도를 넘는 불필요한 기운을 말하는데요, 풍사가 너무 과할 경우 몸의 표면과 윗면을 공격합니다. 머리가 아프고 땀의 배출을 어렵게 만드는 거죠. 한사가 과할 경우에는 살갗을 꽁꽁 죄어버려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발열 반응이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풍한사가 오면 몸의 표면을 지키는 기운과 충돌해 표면의 모든 구멍이 움츠러들게 되고, 오한이 생기고, 땀이 못나오며 몸이 여기저기 막혀 통증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땀의 배출입니다. 왜 어릴 적 어른들이 감기에 걸리면 이불 뒤집어쓰고 흠뻑 땀을 흘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초창기에 땀을 빼지 못하면, 이 사기가 안으로 들어가 근육과 뼈에도 차갑고 아픈 증상이 나타나는 거죠. 이즈음되면 감기로 막을 수 있는 게 이런 저런 병으로 확장되어 버립니다. 한 마디로 푹 쉬고 잘 먹으면서 기를 보충하고, 땀을 흠뻑 흘려라. 이게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감기의 처방 방식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사실 존재와 병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삶이 있는 곳에 늘 병이 있는 것이지요. 지금 감기가 왔다, 그러면 그저 “아 내가 지금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과 기운이 많이 소모되었구나, 그래서 외부의 기운에 졌구나.” 이걸 인정하면서 겸손하게 그 시간을 버텨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금년 겨울에 저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독감과 감기가 창궐한 것은 어쩌면 한파와 미세먼지라는 엄청난 외부의 나쁜 기운을 감당하기에 우리의 정기가 튼실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도 우리의 정기를 보하면서, 세상과 다시 맞짱을 떠보죠. 겸손하게 튼실하게. 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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