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2005).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사를 위하여 : 연국방법론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이론 1-2. p 106~161.
▢ 주요 내용
1. 새로운 역사학 이후의 커뮤니케이션사 쓰기
새로운 역사학의 방법론적 윤곽을 개관하면서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몇몇 시사점과 성찰의 여지가 있는 쟁점을 중심으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사 쓰기에 유용한 내용을 논의하고자 한다.
2. 새로운 역사학의 도전
새로운 역사학은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아날학파와 그 이후의 역사학을 말한다. 새로운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역사가들이 신성시했던 정치, 경제, 연대기 중심의 역사 서술을 거부한다. 이들은 기존의 역사철학이나 실증주의적 역사관과 단절하고, 역사학의 인식론적 지위를 다시 질문하게 되었고(새로운 문제), 역사학의 전통적인 영역들을 변경하고 전복시켰으며(새로운 접근), 이전까지 역사가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대상들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새로운 대상). 새로운 문제, 새로운 접근, 새로운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학은 자기 분열과 진화를 거듭하면서, 전체사, 구조사, 계열사에서 일상사, 심성사, 신문화사, 미시사, 구술사 등까지 다양한 연구 유형을 탄생시킨다.
새로운 역사학이 기존의 역사학과 다른 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적 패러다임은 정치사를 중심에 놓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은 “모든 것은 역사를 가진다”는 전제 아래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변화하는 ‘문화적 구성물’로 파악한다. 둘째, 전통사는 역사를 사건들에 대한 서사로 보았지만, 새로운 역사가의 입장은 좀더 미묘하다. 사회사는 애초에 구조분석에 강조점을 두면서 서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사회사에서 문화사로의 이행과 더불어 서사의 복귀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조사는 여전히 진지한 서술방식으로 남아 있으며, 문화적 전환과 더불어 되돌아온 서사는 이전에 비해 훨씬 두껍고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셋째, 전통적 역사는 위인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새로운 역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 넷째, 전통적 패러다임에서 역사는 공식 기론문서에 기초했다만, 새로운 역사학은 공식자료를 포함해 민담, 소설, 유물, 회화, 건축물 등까지 다양한 종류의 증거들까지 검토한다. 다섯째, 전통적 패러다임이 개인과 사건의 수준에서 역사적 설명이나 해석의 근거를 찾는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집단행동과 구조적 추세, 심성, 문화 등의 수준에서 역사적 설명이나 해석의 근거를 찾는다. 일곱째, 새로운 패러다임은 학제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3. 사료수집과 생산 : 범위와 종류의 확장
역사는 무엇보다 ‘흔적에 의한 지식’이다. 역사 연구는 사료에 의해 숙명적으로 한계지어진다. 새로운 역사학은 우리에게 사료범위가 무한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며, 새로운 사료를 발굴, 생산하고, 기존에는 사료로 여겨지지 않던 것을 사료로 이용할 수 없는지 고려해보기를 권유한다. 이와 함께 사료의 계량화 노력은 최근 미시사의 강력한 부상과 더불어 회의적 시선이 많아지긴 했지만, 증거의 다원성과 수렴에 의해 상대적으로 입증되는 역사담론의 성격상 여전히 중요성을 지닌다. 먼저 그것은 현상을 간명하게 기술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여러 가능한 명제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그럴듯한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수치는 단편적 텍스트 못지 않은 하나의 지표이자 흔적으로서 역사가의 직관을 이끌 수 있다(Grenier, 1995, p 183). 이렇게 볼 때 연구자가 유의해야 할 점은 사료의 성격이나 종류, 범위 등은 연구대상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따라 규정되며, 궁극적으로 역사가가 이용하는 문제틀에 의해 결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살펴볼 텍스트가 ‘책의 역사’에서 출발해 ‘독서의 역사’로 나아간 샤르티에의 작업이다. 그는 책이 누구에 의해 소유되었으며, 계급별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기술에서 책을 포함한 다양한 형식의 텍스트가 이질적인 집단들을 가로지르며 어떻게 유통되고 어떤 방식으로 읽혔는가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4. 사료비판 : 구성주의적 시각의 영향
역사는 경험과학으로서 사료에 의존한다. 그런데 과거가 남긴 흔적들은 대부분 무수한 목격자와 중개자, 나아가 제도와 문화적 형식에 의해 오염되어 있으며, 시간에 의해 파손, 변질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료비판은 수집된 사료가 증거로써 도움을 주는지, 만일 그렇다면 어느 정도 주는지를 판별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료는 새로운 형식의 비판을 요구한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학이 사료의 확장에 상응하는 비판양식을 충분히 고안했다고 보기 어렵다. 가령 문학을 사료로 선택할 경우, 텍스트의 성격(생산자, 내포된 독자, 양식 등)에 대한 면밀한 고찰에서부터 내용의 일관성에 대한 검토, ‘비문학적’ 증거에 의한 보완적 확인 등의 작업이 요구된다. 이미지를 사료로 선택할 경우에도, 이미지의 형식과 종류, 용도, 제작상황, 시대적 배경 등에 대한 정확하고 충분한 인식과 주의가 필요하며, 이미지 해석에서 도상학(iconography), 도상해석학(iconolocy), 정신분석학, 구조주의와 같은 인식도구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정교한 방법적 절차가 발전해오지는 못했다.
새로운 역사학이 새로운 사료들의 활용에 적합한 실용적 비판의 기술을 정교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사료의 존재양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사료비판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사회적 현실이 특정한 권력관계 속에서 담론적으로 해석되고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구성주의적 시각의 도입은 그러한 문제제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주체와 대상의 구성과정에 모두 작용하는 권력관계와 언어적 차원의 필수불가결하면서도 비환원적인 성격을 강조한 일련의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들(푸코가 대표적 저자)이 역사학 안에 수렴된 결과이기도 하다. 구성주의적 시각은 사료의 원작자가 사료를 생산한 진정한 주체이고, 사료와 지시대상의 관계가 투명하고, 사료가 지시대상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전제를 의심하며, 특정한 사료의 존재 못지않게 다른 사료들의 암묵적 부재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제 비판의 주된 의의는 사료의 내적 특징들을 평가하고, 역사가가 거기에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의 영역을 한정하는 데 있게 된다. 그러한 목적에서 과거의 복잡한 권력망과 담론형태 안에 사료를 위치시키고, 사료와 지시대상 사이의 투명한 관계를 부인함에 따라 사료비판은 때로 아주 급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통계자료에 대한 검토 역시 자료생산에 이용된 범주와 도구의 역사성에서부터 자료 생산과정과 맥락, 권력 효과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되었다.
5. 사료의 해석-중요성과 위험성
역사는 경험과학일 뿐만 아니라 해석과학이기도 하다. 역사연구는 유물, 지표, 통계자료, 문서자료, 구술담론 등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지속적인 해석활동으로 특징지워진다. 새로운 역사학은 사료 해석의 가능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새로운 해석의 바탕이 되는 전반적인 시각의 전확이라는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역사 서술방법으로서 해석의 강조라는 측면이다. 먼저 전반적인 시각의 전환을 살펴보면, 새로운 역사학은 주류 집단중심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종래의 역사 서술에서 배제되었던 민중의 경험과 인식세계, 태도, 집단적 열망 등이 주제가 되었으며, 이는 사료 해석에 있어서도 근본적 시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즉 사료의 의도와 시각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뒤집어 해석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작업이 중요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배집단에 의해 생산된 공식 문서와 자료들을 권력과 편파성, 이데올로기의 증거로 읽을 수 있고, 민중의 정서나 신념, 행동에 대한 지배계급의 우려 담론 혹은 도덕 담론을 오히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민중사의 증거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구체적인 역사 연구방법으로서의 해석이라는 측면은 특히 긴주부르그의 ‘지표 패러다임’에 기초한 미시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화적 틀 안에서 한 사건이나 행위의 여러 숨겨진 의미 차원을 재구성해 가는 것이 신문화사, 미시사의 해석방법이다. 즉 어떤 사건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상징적인 방식으로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맥락을 다층적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방법은 사료의 특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해석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사료비판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고, 미시사에서 해석은 탐정이나 의사, 정신분석학자가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단서, 징후, 지표에서 전체의 구조적 연관을 추론해 내는 방식을 말한다.
새로운 역사학의 성과는 역사서술에서 방법적 해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 과잉해석의 통제라는 문제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연구자가 가지는 있는 선관념의 지나친 투사와 방법론적 태만은 ‘과잉해석 가위“의 양날이 되며, 그 양날의 사이가 바로 과잉해석의 공간이 된다. 사르당은 과잉해석의 대표적 유형을 다음 다섯 가지로 꼽는다(Sardan, 1996, p. 41~52). 첫째, 단일한 요인으로의 환원이다. 특정한 사건을 설명할 수 요인을 하나로 축소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변수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둘째, 일관성에 대한 강박이다. 가치체계의 모호성과 다원성, 담론 내부의 모순과 차이, 규범과 실천 사이에 흔히 있는 불일치, 표상체계의 유동성과 불확실한 한계 등을 제거하려 들거나 무시할 경우 과잉해석이 발생한다. 셋째, 의미의 불일치다.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상징체계에 숙련되어 있지 못할 경우 개념이나 범주의 시대착오가 나타난다. 넷째, 지나친 일반화다. 다섯째, 숨겨진 의미의 제시다. 검증되지 않은 ’숨겨진 의미의 원칙‘은 어떤 상황의 설명을 위해 곧잘 동원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근대 계몽기때 개인의 욕망과 열정은 국가로 다시 수렴되고 재배치되어야만 했다. 이를 통해서 시대가 요청했던 것은...“ 이런 유형의 과잉해석은 원리나 논리를 주장하면서 경험적 증거의 영역 바깥에서 작동하는 이론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추상적 제도, 개념, 이데올로기적 구성물 등에 행위자의 의도나 결정 등을 돌리는 것이 대표적 방식 가운데 하나다.
자료의 제약 안에서 해석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역사학의 특권이다. 사료의 공백은 역사적 직관과 상상력과 해석으로 메워가며 추론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식론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 잘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자유는 지적 방종으로 흐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잉해석의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한 학문공동체 내의 상호비판과 통제, 연구자 자신의 성찰적 추론이 필요하다.
6. 글쓰기 - 분석가와 이야기꾼.
역사는 결국 서사이며, 진실을 말하는 이야기(Chartier, 1998, p. 247~251)다. 서사는 역사가와 독자와의 의사소통 문제다. 새로운 역사학은 다양한 서사와 글쓰기 방식을 모색하는 단계에 와 있다. 구조대 개인, 추세대 사건, 거시대 미시 식의 그릇된 대립을 지양하고, 맥락의 구성방식을 다원화하려는 노력이 진행중이다. 이런 관점에서 버크는 서사를 두껍게 만들 것을 요구한다(Burke, 2001, p 291). 그에 의하면 사건들의 연속과 이러한 사건들 안에서 행위자들의 의식적인 의도뿐만 아니라 사건을 가속시키거나 정지시키는 구조, 제도, 사유방식 등도 다룰 수 있을 만큼 두꺼운 서사가 필요하다.
7.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사를 위하여.
새로운 역사학은 사료범위와 종류의 확장, 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총체적인 사료비판, 밀도 있는 해석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다양한 서사양식의 실험 등으로 요약된다. 이 글은 새로운 역사학의 지적 자극에 대한 커뮤니케이션학의 주체적 수용이 내부의 학문적 담론의 질을 향상시키고 또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 위에서 씌어졌다. 마이클 셧슨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사 문제틀의 탐색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커뮤니케이션 관련 의제들이 핵심이 되는 역사쓰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커뮤니케이션 역사학 내부에서조차 기술과 문화적 형식의 분리불가능성을 인식하는 연구는 매우 드물다는 점,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의 문제와 어떻게 통합시켜야 할지 감이 없다는 점 등을 개탄하였다(Schudson, 2005, p.248). 셧슨의 이러한 지적은 다른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 의미
재미있는 논문이었음. 사료범위를 어디까지 넓힐 것인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느 범위까지 한정시킬지의 문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모든 게 자료라는 것은 아무 것도 자료가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함. 이 논문을 읽는 중간에 국회에 들어가 문방위 회의록을 찾고, 국정감사 내용을 찾은 것이 실질적인 수확이라면 수확.
자료의 통계적 구성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에 끄덕끄덕. 그런데 내용코딩할 생각하면 답답하긴 답답, 일단 내 박사논문의 경우 자료수집유형을 1) 학술자료 2) 언론자료 3) 정부 공식 자료(국회, 문방위 등), 4) KBS 자료(이사회, 편성, 구술인터뷰), 5) 미디어산업자료로 구분해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함.
두꺼운 서사라는 말이 인상적. 난 논문도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임. 독자가 일단 재밌어야 함. 논문이기 때문에 이론적 프레임은 있어야 하지만, 그 프레임에 서사를 쪼그라트려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음. 두꺼운 서사를 위해 일단 푸코책부터 빨리 읽자. 진도 안나가는 중..
사실과 해석의 구분을 늘 염두해두어야겠다는 생각도 꼬리표로...
▢ 더 읽을 거리.
Scannel, P. (2002). History, media and communication. In K. B. Jenson (Ed.), A Handbook of Media and communication research (pp. 191~205). London: Routledge.
Schudson, M. (2005).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역사적 접근. 김승현 외 (역). 『미디어 연구의 질적 방법론』(230~249쪽). 서울: 일신사. (원저 출판연도 1991)
Levi, G. (2002). 미시사에 대하여. 곽차섭 (편). 『미시사란 무엇인가』(57~92쪽). 서울: 푸른역사. (원저 출판연도 1992).
Davis, N. Z. (1998). Le reour de Martin. 양희영 역 (2000). 『마르탱게르의 귀향』. 서울: 지식의 풍경
Ginzburg, C. (1976). 김정하 유제분 역 (2001). 『치즈와 구더기: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서울: 문학과 지성사.
Darnton, R. (1984). The great cat massacre. 조학욱 역 (1996). 『고양이 대학살』. 서울: 문학과 지성사.
Burke, P. (2004). What is cultural history? 조한욱 역 (2005). 『문화사란 무엇인가?』. 서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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