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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맑스가 Mediation을 이야기 한다면? - Livingstone (2009) On the Mediation of everything.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굳이 블로그에 옮길 이유는 없지만, 뭐~ 여기에 기록해두면 숙제로 내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지는 않아서, 앞으로는 조금씩 흔적을 남겨야겠다.

“There is no pure experience prior to mediation'
 리빙스톤의 ‘On the Mediation of Everything’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 그러나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지게 만들었던 문장.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이 의미는 무엇일까,

이 문장을 보면서 요즘 읽고 있는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진경, 2004)’이 오버랩되었다는... 이 책은 맑스의 대표 저작 자본에 대한 이야기다. 맑스가 서술한 ‘자본’이 아니라, 이진경이 공부한 맑스의 ‘자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만약 리빙스톤의 저 문장을 이진경 또는 맑스가 바꾼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아마도 이게 아닐까 싶다.

“There is no pure experience prior to others'
“There is no pure experience prior to social relations'

 
써놓고 보니, 크게 차이가 없다. 리빙스톤의 관점은 그런 맥락에서 유물론적이다. 19~20세기 맑스의 유물론이 others, social relations를 이야기하면서 종국에는 그 관계를 소외시키고, 왜곡시키고, 굴절시키는 ‘자본’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면, 21세기 리빙스톤은 others, social relations를 이야기하면서 종국에는 mediation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듯 싶다. 20세기를 살아가는 서구인들의 삶에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시스템이 중요했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있어 디지털 미디어 환경은 자본주의 시스템만큼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맑스의 자본에서 화폐가 단순한 유통수단을 넘어, 모든 관계와 가치를 규정하는 힘을 가지는 것처럼, 리빙스톤이 이야기하는 ‘mediation'에서 미디어는 단순히 a와 b를 매개하는 수단을 넘어, 관계를 규정하고 통제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런 ‘mediation'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mediatization'. Mediatization은 어원적으로 한 군주가 또 다른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디어는 정부, 가족, 공동체, 학교 등 기존의 사회적 제도가 가졌던 권위를 빼앗아, 자신의 아래에 복종시킨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 있어 미디어는 가치의 우선순위, 사회적 상호작용의 특질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것이 리빙스톤이 제시한 ‘Mediatization’의 의미일 것이다.

‘Mediatization’은 ‘Mediation’의 결과이자,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에 따라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정보사회에 대한 해석이다. 이 해석은 맑스의 자본론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너무 미디어 중심적인 개념이 아닐까? 처음의 불편함은 그랬다.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물적 토대가 중요한 데, 그것을 논외로 한 채 ‘Mediatization’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 맑스의 논의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 하부구조가 모든 상부구조를 설명할 수 없듯, 미디어가 모든 사회적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 개인의 경험과 자아를 규정하는 타자와의 관계맺음이 정말 미디어에 의해서 매개되는 관계만 있는 것인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직접적인 접촉의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맑스의 자본론이 20세기 자본주의 세계를 해석하는 주요 테제였다면, ‘Mediatization’은 21세기 테크노폴리 세계를 해석하는 주요 테제가 분명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다시 맑스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만든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 es Kommt darauf an, 냗 켜 veranderm).

맑스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이다. 리빙스톤의 ‘Mediatization’을 읽으면서, 문득 이 문장이 떠올랐다. 테크토폴리 사회를 ‘Mediatization’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깔은 미디어를 매개로 한 개인과 조직과 사회의 실천 양상들에 의해 다른 색채를 띠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런 맥락에서 Mansell(2010)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Information Society : A Critical Review>는 테크토폴리 사회에 담론화되는 ‘Mediatization’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강조한다. 아마도 그것이 ‘Mediatization’을 좀 더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주시켜나가는 기본 전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맑스가 21세기에 ‘Mediatization’을 이야기한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모든 유물론의 결점은 대상, 현실, 감각을 단지 객체 내지 직관의 형태로만 파악했을 뿐, 그것을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으로, 즉 실천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자본, 제 1테제 中).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실천이었다. 그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미디어 그 자체의 속성보다, 미디어 내외부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관계들의 실천을 관찰, 사유했을 것이다. 미디어를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개인과 조직과 사회의 실천 양상들,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관계짓는 미디어 활동들,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무수한 활동들... 그리고, 미디어에서건 그것을 말하는 찌라시에서건, 그 안에서 수많은 실천들로 축적된 데이터에서건, 그는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들을 모두 모아 사실들을 스스로 말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반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던질 제언.

“테크노폴리에서 행복하고 싶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구? 방법은 하나야. 싸울 수밖에...” 

<관련 추천 문헌>
이진경 (2004).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Bolter, J. & Grusin, R.(1999). Remediation : understanding new media . 이재현 역(2006).『재매개 : 뉴미디어의 계보학』. 커뮤니케이션북스.
Shirky, C.(2008). Here comes everybody. 송연석 역(2008).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갤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