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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절망에 반항하라: 루신 읽기

찌질함을 넘어서는 예민함에 대하여, 쿵이지


쿵이지.

루쉰이 자신의 단편소설 중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작품입니다. 쿵이지를 읽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몰락한 전통 지식인의 삶입니다. 쿵이지, 훤칠한 키에 희묽은 얼굴 주름 사이론 상처자국이 끊이질 않았고 희끗한 수염을 덥수룩하니 달고 있습니다. 걸친 것이 지배계급, 자본계급, 지식인계급을 상징하는 장삼이라곤 하나, 땟국에 절고 너덜거리는 것이 십 년 정도는 빨지도 꿰매지도 않은 듯싶습니다. 말끝마다 이로다, 하나니를 달고 다니는 통에 듣는 이로 하여금 긴가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웃음거리가 됩니다. 과거에 붙을 만큼 학식을 갖춘 것도 아니고, 부지런한 것도 아니고, 아이들과 노동계급을 상대로만 아는 척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니 초라함이 더해집니다.

 

쿵이지가 나타나면 모든 술 손님은 그를 놀려 댔다. 누군가가 쿵이지, 얼굴에 흉터가 하나 더 늘었구만!“하면 그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술탁 안쪽으로 두 사발 데워 줘.“하면서 아홉 푼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또 일부러 큰소리를 질러 댔다. ”자네 또 남의 물건을 훔친 게로구만!“ 그러면 쿵이지는 눈을 부릅뜨고 되받았다. ... 사람들의 집적거림은 계속된다. “쿵이지, 자네 정말 글을 아나?”. “어째서 반쪽짜리 수재도 따내지 못한 거지?” 쿵이지는 금세 풀이 죽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면서 잿빛 얼굴로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번엔 온통 이로다, 하나니 따위여서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때쯤 모두들 웃음을 터트린다. 가게 안팎에는 상큼하고 발랄한 공기가 가득찬다. 그럴 때 나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주인양반은 이를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긴커녕 매번 그가 발 벗고 나서 쿵이지를 집적거리며 사람들을 웃겼던 것이다. 쿵이지는 저들과는 말이 안 통한다고 치부하고 아이들에게만 말을 걸었다. 한번은 나한테 물었다. 글공부를 했느냐? .. “내가 가르쳐 주마. 익혀 두거라! 이런 글자는 익혀 두어야 한다.” 우습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해서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 어떤 때는 이웃의 꼬마들이 웃음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와 쿵이지 주변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 쿵이지는 이처럼 사람들을 쾌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없이도 사람들은 이렇게 지냈다. (루쉰전집 2, p. 46~ 48)

 

매우 짧은 단편 소설인데 쿵이지를 읽다보면 이래저래 가슴이 먹먹합니다. 쿵이지가 망해가는 중국을 상징하거나, 몰락한 전통 지식인의 삶을 그려내거나, 변화된 시대상을 수용하지 못하고 허세와 위선으로 무장한 꼰대의 모습을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변화된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어른들, 저물어가는 세대들, 자존심만 남은 지식인 등등을 조소하고 멸시하는 또다른 나를 너무도 많이 만나 먹먹했던 겁니다. 생각해보면 쿵이지는 성공한 사업가도 지식인도 아니지만 주점 주인에게, 이웃 꼬마들에게 일방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이웃에게 술안주 회향두를 하나하나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지닌 인물입니다. 물론 그의 이야기는 답답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쿵이지를 무시하고 조소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쿵이지를 보면서 알제리의 독립혁명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프란츠 파농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검은 얼굴 하얀 가면>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니그로는 비교다라는 아주 단순 명쾌한 명제를 주장합니다. 검은 얼굴을 한 피지배자들이 하얀 언굴을 한 지배자들에게 마음까지 점령당함으로써 자신들의 현실과 반대로 지배자의 논리를 가지고 하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요, 쿵이지를 읽다보면 파농의 목소리가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보다 힘 센 사람의 폭력, 보이지 않지만 거대하고 우리를 누르고 있는 자본과 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에는 침묵하고 동조하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과 자신보다 약한 친구들만 못살게 구는가?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모습이 인간의 삶의 현장, 저작거리, 시장, 광장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게 바로 인간, 호모사피엔스의 특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쿵이지를 보면서 먹먹하고 불편했던 것은 바로 내 안에 자리한 이 찌질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데요. 혁명과 변화가 어려운 것은 이 찌질한 모습을 넘어서는 선한 마음과 용기가 전면에 서야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석이 지나자 가을바람이 하루가 달리 차가워지는 것이 초겨울이 코앞인 듯했다. “한 사발 데워 다오.” 일어서서 밖을 둘러보니 쿵이지가 선술 탁자 밑에서 문지방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거였다. 너덜거리는 겹옷을 입고 책상다릴르 한 채 바닥에 거적을 깔고 새끼줄로 그걸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나를 보고는 거듭 재촉했다. 한 사발 데워 다오. 주인양반도 고개를 내밀더니 힐끗 말을 던졌다. “쿵이지인가? 자네 아직 외상이 열아홉 푼이나 남았어!” 주인은 여느 때처럼 웃으며 말을 건넸다. “쿵이지, 자네 또 물건을 훔쳤지?” “훔치지 않았다면 어째서 다리가 사단이 난 거냔 말이야?”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는 듯했다. 벌써 몇몇이 모여들어 주인과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 그 뒤로 또 오랫동안 쿵이지를 보지 못했다. 연말이 되자 주인은 칠판을 떼 내리며 말했다. 쿵이지는 아직도 외상이 열아홉 푼 남았구만! 그 다음 해 단옷날이 되어서도 또 그랬다. 쿵이지는 아직도 외상이 열아홉 푼 남았구만. 그러나 올 추석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연말이 왔어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아마 죽었으리라. (루쉰전집2, p. 50)

 


제가 루쉰을 좋아하는 것은 이 냉정하고 날카로운 리얼리즘때문인데요, 이런 소설을 읽고 나면 내가 쿵이지가 될 수도 있고, 술집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종업원이 될 수도 있고, 손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오금이 시립니다. 그리고 묻게 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 희망은 있는가? 혁명과 변화의 희망을 품는 것이 인간 사회에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루쉰이 강조하는 것은 중간물의식입니다.

 

그는 생활과 투쟁을 무덤으로 통하는 길로 간주했고, 이 길은 탐색과 실천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인도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 ‘중간물의식은 일종의 생명의식이자 평민의식이었으며, 혁명의식이었다(임현치, 2006, p188).

 

루쉰은 혁명과 변화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중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임무는 약간의 각성이 생긴 후에 하나의 새로운 소리를 내는 것이지, 유일무이한 확신의 주장을 단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자리한 식인(광인일기)과 쿵이지와 술집 주인의 모습이지요.

 

변화와 혁명은 누가 만드는 게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이 만드는 게 아니라 개인의 역량과 마음만큼 이루어집니다. 변화의 시대, 모두 같이 동일한 목표를 향해 열망하고 함께하는 것 같지만, 위기와 기회의 순간 앞에서 우리는 때론 식인으로 때론 쿵이지로 때론 술집 주인의 모습을 보일 겁니다. 그래서 예민한 감수성과 따뜻하고 용기있는 마음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하루도 가벼운 발걸음과 따뜻한 마음과 작은 용기를 가지고 가볼 준비 되셨나요?

굿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