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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절망에 반항하라: 루신 읽기

아이를 구해야 할텐데. [광인일기]

외부의 바람에 의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를 대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트코인, 트럼프, 아베, 김정은, , 성폭력, 갑질, 가짜뉴스, 구조조정, 집값상승, 청년실업, 왕따, 미세먼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어떤 사건들이 몰고 오는 변화는 때론 폭력적이고 어쩌면 비루하기도 합니다. 방치하고 유예하고 책임을 미루다 곪은 상처가 터져 절뚝거리기도 합니다. 촛불혁명 후 마음은 기대와 희망으로 넘실대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잘못된 관성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습니다. “희망”, “기대”, “변화의 열망이 넘실대는 공간에 있다 보면 오히려 적막과 공허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쩌면 그러한 이유 때문에 루쉰을 다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해혁명이 좌절된 시절, 루쉰은 베이징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옛 비문을 베끼고, 잡문을 쓰며 지냈습니다. 당시 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전에는 내 마음도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하였다. 피와 쇠붙이, 화염과 독기, 회복과 복수, 헌데 문득 이런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때로는, 하릴없이, 자기 기만적 희망으로 그것을 메우려 하였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의 방패로 공허 속 어둔 밤의 내습에 항거하였다. 방패 뒤쪽도 공허 속의 어둔 밤이기는 마찬가지이건만, 그런, 그런 식으로, 나는 내 청춘을 줄곧, 소진하고 있었다. 내 어찌 나의 청춘이 벌써 흘러갔음을 몰랐겠는가? 서글프고 덧없는 청춘일망정 청춘은 청춘이다. 그런데 지금 왜 이리 적막한가? 그때 어디선가 샨도르의 희망 노래 한 자락이 들려왔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 그는 누구에게나 웃음 짓고 모든 것을 준다. 그대가 가장 큰 보물. 그대의 청춘을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버린다.’ 참혹한 인생이여! 폐퇴피 샨도르처럼 강단지고 용감한 사람도 어둔 밤을 마주하여 걸음 멈추고 아득한 동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말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 (루쉰 전집 3, 희망 )



어떠세요? 절망적인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죠.

희망은 창녀, 청춘을 바쳤을 때 희망은 당신을 버린다. 그리하여 허망하다.”

여기까지 읽으면 아프고 적막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론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는 말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다.”

변화의 시대, 격동의 시대, 많은 사람들은 희망과 승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 반복되고 반복되는 목소리입니다. 루쉰은 이 목소리에 비수를 꽂습니다. 그렇다고 그 반대급부로 허무나 절망이나 냉소로 숨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 경계에서 살아내는 것.

오늘 이야기는 루쉰의 데뷔작 <광인일기>입니다. 광인일기는 변화의 시대, 경계에서 살아가는 삶의 고투가 느껴지는 글인데요, 그 속으로 한걸음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광인일기의 첫 번째 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달빛이 참 좋다. 돌아보니 달을 못 본 지도 벌서 30여 년이 지났다. 온통 미몽 속을 헤매었던 게다. 정신을 차리고 달빛이 내리쬐는 주변을 돌아본다. 자오씨네 개가 노려보고 있다. 겁이 난다(노신전집 2, p.30 ).”

 

광인은 달빛을 바라보고 지난 30여 년 간 미몽 속을 헤매던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자오씨네 개가 노려보고, 자오구이 영감이 수상하며 길에서 마주한 사내들, 꼬마 녀석들, 여편네들이 수상쩍습니다. 집안사람들의 눈빛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만사는 모름지기 따져봐야 하는 법. 광인은 이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하는데요, 역사책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며칠 전 한 사람이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는데 몇 사람이 그의 심장과 간을 파내 기름에 튀겨 먹었다는 늑대촌 소작인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글쓰기를 배우면서 형으로부터 알게 된 예로부터 사람을 다반사로 먹어왔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그리고 역사책을 뒤적여 보았더니 맙소사,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삐뚤삐뚤 적혀 있는 인의니 도덕이니 하는 글자 사이에 식인이라는 글자가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중국 4000년의 역사는 사람을 먹어온 식인의 역사였다는 거죠. 제가 볼 때 이 식인은 은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이거야말로 루쉰이 희망과 절망의 경계 사이에서 냉정하게 바라본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식인에서 진보와 보수,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나이든 사람과 청년,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갑자기 웬 자가 왔다. 나이는 기껏해야 스물 안팎에 생긴 건 분명치가 않다.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나한테 고개를 까닥이는데 웃음도 진짜 웃음같진 않다. 내가 물었다. “사람을 먹는 게 옳은 일인가?” 

그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흉년도 아닌데 사람을 먹을리가요.”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놈도 한패로 사람 먹기를 즐기는구나. 끈질기게 추궁했다

옳냐고?” 

그런 걸 뭐하러 물으십니까? 원 참... 농담을 다 하시고... 오늘 날씨 참말로 좋구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옳은 거냐구?” 그는 그렇다고 하진 않았다.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고 할 수는...” “옳지 않다고? 근데 저놈들은 어째서 끝끝내 먹으려 하지?” 

그럴 리가요...” 

그런 일이 없다고? 늑대촌에선 지금 먹고 있어. 책에도 적혀 있다니까, 시뻘건 피를 뚝뚝거리면서!” 

일순 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러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있을 수도 있겠죠 뭐. 예전부터 그래 왔으니까...” 

예전부터 그래 왔다면 옳은 거야?” 

댁이랑 그런 이치를 들먹거리긴 싫소이다. 아무튼 댁은 입닥치쇼. 입만 벙긋하면 헛소리를 해대니,” 

벌떡 일어나 눈을 뜨자 그자는 보이지가 않았다. 저놈 나이는 형보다 한참 어린데, 그런데도 역시 한패인 것이다. 이건 분명 제 에미 애비가 가르쳐 준 게다. 어쩌면 제 자식에게 가르쳐 줬는지도 모른다

(노신전집 2, p.38 ).”


 오랜 풍습으로, 부모에게 되물림 되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남녀노소 모두가 식인을 하는 세상, 그러나 거리에서 마주한 남녀노소 수많은 식인들은 노골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의예지도덕 때문에 사람을 먹고 싶어 하면서도 감출 방법만 강구하고, 음흉하고 겁약하고 교활하게 사람 먹을 생각으로만 가득합니다.

이 거대한 식인의 네트워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해 광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놈들은 그저 죽은 고기밖에 먹을 줄 모르지! 제일 불쌍한 건 우리 형이다. 그 역시 사람인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작당을 해서 나를 잡아먹으려 한단 말인가? 하도 인이 박혀 나쁘다는 걸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양심이 다쳐 뻔히 알면서도 부러 범하는 것일까? 사람을 먹는 사람을 저주함에 있어 먼저 형에서 시작하리라. 사람을 먹는 사람을 만류하는 일도 먼저 형부터 착수하리라(노신전집, p.38).”


그가 먼저 할 일은 형의 식인을 만류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전투의 시작. 그러나 전투는 무력합니다. 예전부터 그래 왔다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따져 묻고, 한 걸음 방향만 틀면 즉각 고쳐져 태평해질 것이라고 호소하지만,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광인으로 매도될 뿐입니다


그리하여, 외침의 결과는 감금입니다. 해도 뜨지 않고 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 유폐된 공간에서 그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현실을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좀 더 처절하게 기억을 소환하고, 경험을 의미화 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마주하는 하나의 진실

 

한 점을 먹을 수 있다면 물론 통째로도 먹을 수 있다. ..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사천 년간 내내 사람을 먹어온 곳.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도 그 속에서 몇 년의 뒤섞여 살았다는 걸.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인데...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 (p. 42)


그 누구도, 하물며 자기 자신조차도 식인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을 통찰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머뭇거리게 됩니다. 식인 하는 사람에게 외치겠다는 다짐과 확신들은 바로 이 순간 통렬한 자기 성찰 앞에서 머뭇거려집니다. 자기 역시 식인의 가해자 혹은 동조자라는 사실, 이 처절한 자기 성찰 앞에서 그의 이야기는 이제 힘찬 구호와 느낌표를 토해내지 못하고 말줄임표로 매듭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광인은 이런 말로 일기를 마칩니다.


사람을 먹어 본 적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p.43)”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이 언어에는 구할 수 있다는 확신도 구해야만 한다는 당위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 구절에서 느끼는 것은 루신의 안타까움과 적막감이었습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광인의 목소리에 공명하게 됩니다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말줄임표에서 뭔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루쉰은 스스로의 임무를 약간의 각성이 생긴 후에 하나의 새로운 소리를 내는 것이지, 계몽적이며 확신에 찬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희망에 찬 인도도, 절망에 찬 계몽도 허망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것은 의문과 탐색, 그리고 나 역시 식인이라는 각성과 새로운 소리. 


변화의 시대. 여기저기서 큰 목소리가 들립니다. 

희망에 찬 들뜬 목소리, 타자에 대한 비난, 계몽과 힐책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한 점을 먹을 수 있다면 통째로도 먹을 수 있다."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

"사람을 먹어 본 적 없는 아이가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텐데..."

이런 이야기가 오히려 더 필요한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새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