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의 《고향》 중에서 -
드라마 미생의 마지막회를 기억하시나요? 미생이 살아남기 힘든 희망없는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담긴 엔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루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즈음 부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회가 되면 루쉰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관련하여 책도 보고, 세미나도 참여하고, 그러니깐 전 루쉰을 애정합니다.
<공부의 즐거움>에서 틈틈이 루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루쉰을 읽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부를 넘어 제게는 어떤 실존적 울림이 있습니다. 한 루쉰 연구자는 루쉰 정신을 반항, 탐색, 희생으로 요약했는데요. 루쉰의 반항은 도저한 회의와 부정의 정신에 기초합니다. 탐색은 두려움 없는 모험정신과 지칠 줄 모르는 창조정신에서 시작됩니다. 희생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여린 연민과 양심에서 가능합니다. 이 모든 정신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세계와 삶에 대한 예민함,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의 대결,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허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루쉰전집 서문)
“현재의 문인 가운데 중국 민족에 대해 이만큼 어두운 비관을 품고 있는 이는 그 외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저우쩌런, 루쉰에 대하여)”
어두운 비관을 품고 있다 해서 너무 차갑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차가운 피부 밑에 끓어오르는 피와 열정이 문장 곳곳, 삶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관이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비관과 함께 붙는 냉소주의를 경계합니다. 그러나 루쉰의 비관은 냉소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차갑지만 뜨겁고, 허무하지만 열정적이며, 절망적이지만 바로 그것에 반항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이 터를 잡고 있는 현장, 즉 20세기 초반의 중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의 중국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중국인이 축적해 온 원한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들은 강자에게 유린당한 결과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들은 강자에 반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약자에게서 그 배출구를 찾으려고 한다. 군대와 비적이 서로 싸우지 않고 맨손의 인민이 군대와 비적 양쪽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가장 비근한 증거다. 더욱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양쪽이 다 비겁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비겁한 인간은 설사 만 길이나 되는 분노의 불길을 갖고 있더라도 가냘픈 풀포기밖에는 아무것도 태우지 못한다. (잡다한 기억, 1925).
저는 이 감정이 지금 저를 둘러싼 서울의 감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짧게는 지난 몇 년간, 길게는 지난 수십년 간 축적해 온 원한, 이 원한을 엉뚱한 데서 푸는 것은 아닌지, 곳곳에 넘치고 넘치는 증오와 혐오 표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현장에서 루쉰은 청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나는 청년들에게 내가 걷는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이나 처지가 같지 않습니다. 사상의 귀결점도 아마 일치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만일 나더러 청년들이 무슨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꼭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남을 위하여 생각해두었던 말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첫째는 생존, 둘째는 충족, 셋째는 발전입니다. 만약 감히 이 세 가지를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이든 우리는 그에 반항하고 그를 박멸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또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하여 몇 마디 부언해야겠습니다. 즉 내가 말하는 생존은 결코 구구한 삶이 아닙니다. 충족은 사치가 아닙니다. 발전도 방종이 아닙니다. (베이징통신, 1925)”
루쉰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존, 충족, 발전,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풀려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존, 충족, 발전, 저항을 키워드로 하는 루쉰 읽기를 딱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삶과 화해하지 마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잠못드는 청년들도 친구들도 선배들도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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