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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절망에 반항하라: 루신 읽기

<아q정전>, 너희가 우리를 어떻게 혁명하겠다는 거냐?


루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q정전을 떠올린텐데요. 루쉰의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그 아a정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q정전]1921년에 베이징의 일간지 <신보>에 매주 1장씩 연재된 소설인데요, 당시 루쉰의 나이는 마흔,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면 미몽에 그친, 처절하게 실패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 신해혁명 10주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청춘에서 중년으로 가는 시간, 그리고 신해혁명 10주년, 왜 바로 이 시기에 루쉰은 [q정전]을 썼을까요? 루쉰의 꿈이 있었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공의 변화요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자기가 사는 땅에서 혁명은 늘 실패하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당시 가장 혁명에 가깝다고 생각한 국민당 정부는 실상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적폐세력으로 판가름 나고, 이에 대항하는 혁명진영은, ~ 입으로는 혁명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우두머리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혁명의 주체인 시민들은? 나르시시즘의 결정체. [q정전]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왜 혁명이 실패하는가? 그건 바로 수많은 아q들의 나르시시즘, 정신 승리법 때문이다! 이게 이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루쉰이 주인공 아q에게 부여한 성격은 q는 자존심이 강했다는 문장에 압축됩니다. 오랜만에 [q정전]을 다시 읽었는데요, 정말 이 친구는 자뻑의 제일인자였더군요. 늘 남이 문제고, 자기는 위대하다. 루쉰이 볼 때 이 긍지와 자존심은 약자의 자기위안에 불과하며, 정신승리법이며, 그것이 중국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결정적 마음체계였습니다.


혁명의 전제조건, 아니 혁명은 너무 거창하고 어제보다 조금 나은 변화의 전제조건은 무엇일까요? 변화의 주체들이 어제의 를 버리는 것, 이른바 자기 버리기. 그러나 우리의 아q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 기만의 태도로 실존을 대하다보니 문제의 본질로 들어갈 수 없고 영원히 문제의 외피에 맴돌면서 일종의 가상공간에서 생활하게 됩니다(노신평전, p. 121). 루쉰은 자신이 사는 공간을 무수히 고립된 아q들의 집단이라 보고, 이들이 현실 바깥을 떠돌기 때문에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 씁쓸함이 이 소설에 짙게 묻어 있습니다.


루쉰의 글에는 수많은 아Q, 수많은 노예들이 등장하는데요, 입신양명과 돈의 노예, 권력의 노예, 서구 지식에 압도된 지식인 노예, 저항할 줄 모르는 노예 등등. 구시대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혁명을 했는데, 웬걸 그들은 또 다시 혁명의 노예가 된 겁니다. 문제는 습관이었습니다. 어제로부터 지속되어 온 습관. 이른바 노예 근성. 구시대의 노예로 살다가 혁명 이후에는 혁명의 노예로 살다 죽은 아Q를 통해 루쉰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혁명과 변화란 무엇인가?”

우리 안의 노예근성을 없애는 것.


노예근성이 무얼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강자에게 비굴하고(강자의 논리를 자신의 논리로 삼고), 약자에게 강한 것(약자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쳐 박아 놓고 비웃는 것), 이게 노예근성의 뿌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많이 아프지만 요즘 제가 몸담고 있는 방송가 사람들의 갑질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이 갑질의 뿌리도 결국은 노예근성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결국 혁명은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이 아니라, 깨알같은 내안의 수많은 노예근성들, 관성들을 자각하는 일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쉰과 흔히 비교가 되는 동시대 인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일본의 나쓰메소세키를 드는데요, 그는 1911년 바다건너 중국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기운을 보며 이렇게 적습니다. “통쾌하기보다 두렵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세키의 딸) 히나코가 죽은 일 등은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나의 항문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습니다. 혁명을 하는 입장에서는 일상적인 사건들, 마음을 태웠던 딸의 갑작스런 죽음, <아사히 신문> 문예란 폐지, 항문 수술, 신경쇄약의 기운에 시달리는 일상은 아무 일도 아닌 일처럼 여겨지고, 바로 그 감수성이 두렵다는 것이지요. 일상세계에서 나를 지키고,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찌질한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것을 무시하는 혁명, 과연 무엇을 위해서? 소세키는 이걸 묻는 것 같습니다.



<q정전>1923외침이란 제목으로 묶인 글 중 하나로 출판되는데요. 외침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를 루쉰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스스로가 이제는 너무나 절박한 마음에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아직도 과거의 내 적막과 비애를 잊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가끔씩 몇 마디 더듬거리는 외침을 뱉어냄으로써 적막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는 용맹한 전사들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앞으로 달려가게 하고자 한다.”


그러니깐 아q정전은 루쉰의 외침입니다. 삶의 적막과 비애를 잊지 못하며, 그 삶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는 용맹한 전사들을 위한 위로. 솔직히 이 위로는 그로테스크합니다. 일부러 어둡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기 때문에 더욱 그로테스크합니다. 꼭 그렇게 어두워야하나요? 이런 주변의 불만에 루쉰은 아q의 정신승리로 답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q정전>이 발표되고 100년이 지난 2018, 여전히 정신 승리법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아q를 발견합니다. 상대를 어림잡아 보아서 어눌한 자 같으면 욕을 퍼부어 주고 약골 같아 보이면 두들겨 패주는 아q가 있습니다. 얻어 맞고도 흡족해하며 승리의 발걸음을 옮기는 아q가 있습니다. 완벽한 패배를 정신적 승리로 둔갑시켜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드러누운 아q가 있습니다. 승리한 혁명당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주변에서 자신을 깔보던 사람들을 죄다 적폐로 모는 아q가 있습니다. 총살을 당하는 아q를 둔하고도 예리한 눈길로, 그를 씹어 먹고도 모자라 더 뜯어먹을 게 없나 따라오는 또다른 아q들의 눈길도 있습니다.


q들의 세상에서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혁명이란 가능하기나 할까요? 일단 회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식대로 편하게 생각하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무엇보다 정신승리법으로 핑계와 변명으로 점철된 일상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q정전을 접으면서 이 한 문장이 자꾸 마음에 맴돕니다

늙은 비구니가 한 말입니다

너희가 우리를 어떻게 혁명하겠다는 거냐?”(p, 144)


우리의 혁명은 우리가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