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동자일까?
요즘 노동조합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그 뒤숭숭함 속에서 “나는 노동자인가?”라는 새삼스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요즘 조금은 짜증스러운 조합 분위기에 내 스스로 명확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쩝.
각설하고..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계급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에서 노동자를 정의할 때, 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프롤레타리아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나름 중산층 이상의 집안에서 크게 부족함 없이 자라온 가정환경, 사회적인 차원에서 받아온 엘리트 교육, 그리고 그 사회적 자본 아래에서 알게 모르게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의외로 내 주변에 자본가라고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 , 아무리 뜯어봐도 나를 노동자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계급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물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사적인 측면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전문직으로 종사한다고 자부했던 내가 알고 보니 비정규직이고, 어이없이 직장에서 해고되기도 한다는 여울목을 넘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노동자네...”라는 어쩔 수 없는 정체성, 자뻑 정체성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어쩔 수 없었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에 요즘 다시금 의문이 붙는 것은 이 상황이 조금은 변했다는, 그래서 다시 자뻑 정체성(난 달라~ 난 엘리트야~ 난 지식인이야~ 난 전문직이야~ 등등)으로 살아지고 있다는, 또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드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과연 나는 노동자인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길잡이라기보다는,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그 심리적 동기를 조금은 깊게 줌인하게 해주는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인 1936년 조지오웰은 '레프트 북클럽'이라는 좌익 출판문화 단체로부터 영국 북부 탄광 지대에 대한 르포 집필 건의를 받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간다. 레프트 북클럽이 왜 하필 오웰에게 이런 르포를 맡겼으며, 오웰은 왜 탄광 지대와 같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현장을 찾아다녔으며, 그러한 척박한 현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이 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가 작가가 되기 전 직업은 식민지 경찰이었다. 일제 치하 시기, 대한민국에서 독립군을 잡아내고, 고문하고, 사형시키는 일본 경찰의 직무와 유사한 업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나름 스스로를 감수성 넘치는 지식인이라고 규정짓는 인간이 이런 직업을 가졌을 때 느끼는 번뇌와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게다. 결국 그는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낸다. 그러고 나서 속죄의 의미로 3년간 부랑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그는 첫 책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출간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는 이때의 마음이 꽤 두텁게 기술되어 있다.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히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 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200~201쪽)
그는 단순한 제국주의를 넘어서 모든 형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버마가 아니라 자기 나라 안에서 버마인과 같은 '내부 식민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내부 식민지로 들어간다. 거기서 느끼는 그의 감정은 어땠을까? 내가 요즘 느끼는 “노동자”라 불리는, 그러나 너무도 이질적인 개인들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뭔가 오버랩 되는 감정이 아닐까? 노동계급이 혁명과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바로 그 현장에 들어가 그들과 가까워질 때 좌절되고 미끄러진다.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이 있을 수 없다. (…)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217쪽)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감히 중산층의 관념을 넘어설 수 없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이야기하지만, 귀족 노동자는 공장 노동자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직접 고용 노동자는 간접고용 노동자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세상이 점점 더 양극화가 되어간다 할지라도, 그렇게 중산층이 붕괴해간다할지라도, 그렇게 하층민으로 전락한 중산층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라고 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노동 계급에 속하지만 내 자신을 부르주아의 일원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여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303쪽)이다. 뿐만 아니라, "중산층인 사람이 몰락하여 최악의 빈곤층으로 떨어진다 해도 노동 계급에 대한 매몰찬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이런 사람들은 끝내 자신이 노동 계층이라는 것을 수용하기보다 "쉽사리 파시스트 정당에 동조"(303~304쪽)하게 된다.
이 책이 놀라운 것은 1930년대의 이야기가 2010년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중산층의 계급적 위선은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들어맞으며, 경제적 양극화의 밑변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정치적으로는 도리어 보수화되는 중산층의 역설을 꿰뚫어 보여 준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친구인 척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노동 계급을 경멸하는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적 행태를 고발한다. 이들은 일상어와 동떨어진 전문 용어를 내세우면서, 길거리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은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거나 "나를 철저히 변화시"(217쪽)키기보다 "책으로 단련된 사회주의자"(242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
“나는 노동자인가?”
이 질문을 구체적으로 쪼개 보자.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간접고용 노동자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일반 공장 노동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일반 기업 노동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노동자를 친구로 둔 노동자인가?"
"혹시 나는 노동자인 내 친구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노동자가 아닌가?”
이 책은 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면서 실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의 태도를 한번쯤 돌아보게 한 책이다. 조지오웰은 이 다르다는 생각, 태도가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만 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가 헤맨 공간이 바로 가장 하층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탄광 현장이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의 나. 현장에서 좌절했지만, 결국 다시 그 현장에서 다른 이야기를 상상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로, 쉽게 관심을 페이드아웃하거나, 쉽게 안돼~라고 이야기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노동자인가?
이 질문을 들게 한 곳이 바로 그 현장이라면, 이 답 역시 현장에서 찾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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