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부의 즐거움/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

탈북청년들과의 하루,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조금은 정신없는 한주가 지났습니다. 부서가 바뀌었고, 공간이동이 있었고, 신입사원 대상으로 OJT 교육이 있었습니다. 탈북 청년들의 독서모임에 초대를 받았고, 앞으로 1년 동안 함께 프로그램을 보고 의견을 나눌 대학생들을 만나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퇴직을 하고 인생 제 2막을 준비하는 70년대~80년대 학번 선배들과 포장마차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인연과 관계에 설렜고  기를 주고 기를 빨리기도 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오랜만에 과도한 음주로 몸이 녹초가 되기도 한주이기도 했구요. 


그리고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지난 몇 년동안 통일과 미디어 관련하여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이었는데요, 그때 함께 한 선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통일과 미디어라니? 평화통일 미디어 지수를 만든다고?  탈북청소년 대상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커리큘럼을 만든다구? 꿈깨시유. 이런 것 하나마나 아닙니까? " 인연에 이끌려 꾸역꾸역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그것을 수행하면서도 남과 북이 "우리는 하나다"라고 외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열릴지 기대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북정상회담에 있기 전날 저녁, 탈북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탈북민 출신의 통일학 박사 주승현 교수와의 인연으로 함께 하게 된 자리였습니다. 주교수는 탈북 청년들과 함께 몇 개의 모임을 주선하고 있는데요, 그날 모임은 제가 쓴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주승현 교수는 제 아내의 베스트프렌드이자 제 글을 좋아하는 얼마되지 않은 독자이기도 한데요,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를 읽은 후 쓴 주교수가 쓴 자전적 에세이 <조난자들(생각의 힘, 2018년 출간)>은 정말 정말 아름답고 정직하며 용기있는 글입니다. 결정적 계기는 아니겠지만 <조난자들>의 출판에 제 책이 2% 정도의 영향은 주었다고 생각을 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고맙기도 합니다. 우연히라도 이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추천합니다! (더불어 제 책도~ ^^)




각설하고

그날 모임에 참석한 탈북 청년들이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를 무지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에 전 깜짝 놀랐습니다. 제게 전라도는 침묵의 공간이었습니다. 탈북 청년들이 이 책을 읽고 재미있어 하거나 공감한 것은 어쩌면 그들의 꼬리표 북한이라는 공간이 내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전라도라는 공간과 유사한 느낌과 빛깔이기 때문에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쓰고 나서, 지금은 어떠세요? 지금도 불안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전라도가 새긴 주홍글씨가 영향을 미치나요? "

누군가 물었습니다. 책을 쓴 이후의 변화를 물어보는 거였습니다이 책이 세상에 나온 이후 더이상 전라도라는 것이 내 삶에 중요한 화두가 아님을,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질문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가 세상에 나온 이후 전 한 번도 이 책을 다시 들여다 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이미 나로부터, 전라도에서 태어난 오윤이라는 친구를 보냈기 때문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답답한, 공허한 마음, 상처받은 기억들을 풀어내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글로부터 스스로 위로를 받고, 어제와 다른 경험하지 못한 나를 구성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혼자 쓰는 것도 좋지만, 함께 이야기 나누고, 응원하고, 응원받으며 글쓰기 작업을 한다면 스스로에게 훨씬 더 좋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날 밤 전 고난의 행군 시절을 아프게 말하던 친구, 북한에서 아버지의 힘든 고난을 말하던 친구, 국경지역에서 밀수로 살았던 친구, 부모의 이혼과 재혼에 흔들렸던 친구, 무엇보다 북한에서의 경험과 기억을  남한에서 지속적으로 말하고 증명해야 했던 친구들과 정말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들고,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가 나의 것이 아님을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나의 과거, 기억, 경험을 넘어설 단계가 된 겁니다. 그게 남북정상회담 전날 새벽, 느낀 한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울컥하면서 "전라도", "차별", "배제" 이런 단어를 넘어 "북한" ""통일", "평화" "공존" 이런 단어가 새로운 화두로 내 몸 속에 들어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탈북 청년들을 만난 다음 날, 그러니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그날 저녁 남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시끄럽게 떠들고 웃으면서 앞으로 경계할 것이 어쩌면 "북한", "남한" 이런 경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고보면 누군가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설명하는 거만큼 효율적인 척하면서, 비현실적이고 폭력적인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들은 그냥 내게 아낌없이 응원하고 싶은 후배들이고, 밥사주고 싶은 친구들이며, 이 시대의 빛깔을 더불어 함께 만들어갈 동무들이기도 합니다. 서로 토닥토닥하면 한걸음 한걸음 가다보면 좀 더 재미있는 일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그런 기대를 해봅니다. 


물론 상처주고,시기하고, 비교하고, 꼰대질하고, 할퀴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서운해하면서 삐걱삐걱 가겠지만... 그래서 삶이라는 건 재미있는 거겠지요? 과거의 상처와 두려움을 잘 토닥이며 한걸음 한걸음 자유롭고 따뜻하게 잘 가봤으면 좋겠습니다. 너도, 나도, 남한도, 북한도... 우리의 이야기에 새로운 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