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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

삶에 대한 열망, 누구도 이 흔적을 지우지 마라. 몽트뢰로 가는 길 짹깍짹깍.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레만호수의 오후는 조용하다. Silence. 짹깍짹깍, 낮게 나는 새의 조그마한 지저귐 이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이 고요함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은 짹깍짹깍 마음의 시계 정도다. 이제 움직여야 하는데...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오후의 태양 때문도 고요함 때문도 아니다. 내가 내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왔다는 감각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오후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조금 더 이동하려 한다. 무엇이 나일까? 이 고요함이 나일까? 분주함이 나일까? 어느 쪽이라도 좋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오후 4시, 나와 그녀는 몽트뢰 시옹성으로 향하는 유람선을 탄다. 뱃고동소리와 함께 유람선이 출발한다. 바람이 시원하다. 유람선은 사포린(st.. 더보기
[제국의 구조] 3부 제국을 나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 가리타니 고진의 세 번째 이야기. 1~2장에서 고진은 정주혁명과 맞물려 등장한 호수제에 대한 설명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합니다. 개인적으로 증여, 호수제, 상호성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게 따뜻하고 휴머니즘이 짙게 묻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자가 일상에서 강자라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호수제는 어떻게 퇴장했을까요? 증여의 역사는 어느 시대에 종말을 선언한 것일까요? 정말 그것은 사라진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호수제가 어떻게 시스템화되었는지를 잠깐 복기해보겠습니다. 인류의 정주화의 더불어 자유의 상호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딘가에 머물게 되면서 축적이 시작되고, 축적에 의해 생겨나는 계급, 권력, 국가의 탄생이 예고됩니다. 그러면서 상실되는 것은 자유였.. 더보기
[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나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하루키의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그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런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근본적으로 나는 대체 누구인가?”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삶이 우울할 때, 쓸쓸할 때, 외로울 때 아파트 옥상에서 가끔씩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저도 모르게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오늘 읽은 책은 .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나름 초상화 시장에서는 평판이 좋은 친구입니다. “나중에 커서 초상화를 그릴거야!” 그렇게 시작한 일은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먹고 살기 위해 맡은 일들을 해치워 가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붓을 가지고 캔버스 앞에 앉.. 더보기
태양, 포도밭, 그리고 호수가 있었네. 라보지구 마을 로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도시 한 자락의 아침은 조용했다. 호텔의 조용함은 로잔에서는 예외적이다. 호텔 밖을 조금만 나서면 도시는 시끄럽고 분주하다. 들떠있고 생기 넘친다. 이곳은 즐길 것, 볼 것, 먹을 것은 많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난다. 1박 2일의 로잔 여행. 아마 다시 이곳을 방문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러나 이 시간과 장소는 내 마음 속에 새로운 감정과 무게를 더해간다. 이 무게를 굳이 하나의 개념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움의 기운인 듯싶다. 로잔은 산만하고 분주하다. 무언가 무질서해 보이고 남녀노소 모두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고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혼착되어 있다. 그런데 묘하게.. 더보기
[제국의 구조] 2부 억압해도 회귀하는 열망 가리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 두번째 이야기. 제국의 문법과 구조를 나의 것으로 익히고자 할 때 관심을 두어야 하는 단위는 국가가 아닙니다. 국가라는 프레임 하에서는 제국의 문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그를 훌쩍 넘어서 세계무대에 서야 하고, 때로는 그보다 작은 공동체 단위에 관심을 둬야 하는데요, 특히 후자에는 제국의 문법에 차용할만한 많은 보물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과거의 작은 공동체, 그러니깐 씨족 사회에서 캐어낼 수 있는 보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우리는 씨족 사회에서 국가로 역사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고진은 역사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씨족 사회 이전에 유동적 수렵채집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떠돌면서 공동기탁을 하며 수렵과 채집을 하던 그들이 어느 날 정주를 하기 .. 더보기
[제국의 구조] 1부 잃어버린 자유를 탈취하라! 유목의 삶, 제국의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요즘 제 몸에 익히고 싶은 게 있다면 유목의 삶, 제국의 삶입니다. 우리는 흔히 유목하면 “저 푸른 초원”만 생각하고, 제국하면 “미국”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목은 초원만큼 낭만적이지 않고, 미국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유목은 무엇이고 제국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부터 가을에 읽을 책들은 이 두 개념 위를 오갈 겁니다. 그로부터 개별적인 자유와 집합적인 다원성을 강조하는 유목과 제국의 구체적 면모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으려 해요.그 첫 번째 책은 가리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입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이 2014년에 쓴 책인데요. 그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19세.. 더보기
예상치 않았던 여정, 로잔으로 가는 길 아침이 밝았다. 새벽 6시 눈을 떠 테라스에 앉아 홀로 책을 본다. 그녀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체르마트의 아침, 아름다운 풍경이다. 시원한 공기, 청명한 하늘, 지저귀는 새소리, 이를 풍경으로 나는 금년에 출판하게 될 원고의 초안을 읽는다. 넓은 베란다, 시원한 테라스, 그리고 아침의 마테호른. 조용하고 굉장히 멋지다. 어제 새벽 한 무리의 청년 여행객들이 새벽 늦게까지 이 조용한 공간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고함을 지르며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자아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새벽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일당의 무리들이 잠의 세계로 퇴장하자 새벽 6시 체르마트에 남아 있는 것은 침묵과 고요, 그리고 가끔씩 들려오는 바람 소리, 새 소리뿐이다. 이 고요함이 마음에 든다. 그녀는 눈을 뜨자 창문을.. 더보기
잊고 싶지 않은 [주문을 잊은 음식점] 금년에 방송된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인상이 남은 프로그램이 뭘까? 개인적으로 최고의 프로그램은 [나의 아저씨]였습니다. 언젠가 [나의 아저씨]를 복기할 시간이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그늘진 공간의 정서와 이야기를 이토록 따뜻하게 풀어낸 드라마는 앞으로도 당분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아요. 픽션 영역에서 최고가 [나의 아저씨]였다면, 논픽션 영역에서 최고의 프로그램은 지난주 종영한 [KBS스페셜 주문을 잊은 음식점 2부작]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에요.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이 “영업종료”가 된 식당 곳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에서 정말 예기치 않게 눈물이 흐르더니 도대체 멈추지는 않는 거예요. 언젠가 어떤 독서모임에서 “노년”에 대한 책을 함께 읽었는데, 이.. 더보기